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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가짜 사나이만 못한 ‘짜가’ 공직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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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치에디터

김승현 정치에디터

‘짜가가 판친다’고 했던가. 가수 겸 배우 신신애의 노래 ‘세상은 요지경’(1993년)의 가사는 유튜브 예능 ‘가짜 사나이’의 사운드트랙으로 제격이다. 군대 체험 예능으로 대박을 낸 MBC의 ‘진짜 사나이’를 패러디한 영상은 진짜에 버금가는 히트를 했다. 혹독한 생존 훈련과 휴먼 스토리가 원작의 현장감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7월 공개된 1기(총 7회)의 누적 조회수가 5600만회, 지난 1일 시작한 2기(4회)는 3000만회를 넘었다. 악바리 교관 이근 대위는 유튜브의 경계를 뛰어넘어 벼락스타가 됐다. TV 출연은 물론이고 유명 외식업체의 햄버거 모델로도 등장했다.

벼락스타 비위 밝혀낸 유튜브 #요지경 속 정의와 명예 추구 #정작 공적 영역엔 ‘짜가’ 판쳐

그러나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가짜 사나이는 ‘요지경에 빠졌다’. 구릿빛 피부에 선글라스를 낀 이 대위의 카리스마는 유튜브의 검증에 무너졌다. 성형 수술을 받았다는 물증으로 등장한 과거 사진은 애교 수준이었다. 6년 전 200만원을 빌리고도 갚지 않았다는 빚투가 터졌다. 3년 전 서울 강남의 한 클럽에서 여성을 강제 추행한 미투도 드러났다. 벌금형이 확정된 대법원 판결문까지 공개됐다. 출연자의 인성을 지적하며 가짜 사나이들을 몰아쳤던 이 대위의 권위는 추락했다. 가짜에서 진짜로, 다시 ‘짜가’가 됐다.

이 대위에서 시작된 폭로가 또 다른 출연자의 의혹으로 번지자 결국 제작자 김계란은 지난 16일 백기를 들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자 했던 욕심보다 한참 부족한 능력 때문에 출연진을 포함한 그 가족들까지 큰 고통을 겪는 것 같아 비참하고 씁쓸하다”며 가짜 사나이 게시물을 모두 내렸다. 그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며 잠시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저희 팀원들과 함께 재정비하여 더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사과했다. 그 반성이 진짜인지는 다시 유튜버와 네티즌들의 검증을 거치게 될 것이다.

초스피드로 진행된 유튜브 스타의 탄생과 몰락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사는’ 요지경 속에서도 정의와 도덕을 향했다. 콘텐트 시장의 무한 경쟁, 팬덤과 안티가 자정작용의 원동력이 됐다. 가짜 뉴스와 퇴폐 정보의 폐해는 여전히 우리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유튜브 시장에서 응축되는 평범한 이들의 에너지는 기성 권력을 위협하고도 남는다. 아니 이미 전세는 역전됐다.

유튜브 세계관의 출현 앞에 우리 사회 지식인 집단과 공직 사회, 정치권의 운명은 불안하기만 하다. 자정 능력은커녕 언제부턴가 일말의 책임감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 좀비 집단 신세랄까. 최근 교육부 종합감사에서 서울 강남의 유흥업소에서 연구비 등에 쓰일 6700만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한 것으로 적발된 교수들이 어떤 해명이나 사과를 했는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명예를 지켜야 할 순간에 지식인들은 비겁하게 머리를 땅속에 처박는다. 교육부가 중징계를 요구한 교수 중엔 장하성 주중 대사도 포함됐는데, 그는 지난해 정년 퇴임을 해서 징계는 면할 것이라는 얘기만 나올 뿐 해명은 아직이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거쳐 중국 대사를 맡은 공인의 명예가 가짜 사나이만도 못하단 말인가.

장 대사의 모교 온라인 커뮤니티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재벌에게는 한없이 가혹하지만, 본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신 분”이라거나, “깨끗한 척은 하지 말았어야지”라는 비판이 쇄도한다. 후배이자 제자들은 “그건 오해다”라거나 “내가 잘못했다”는 유튜브식 해명을 기다렸을 것이다. 손가락만 까닥해도 전 세계에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고, 김계란도 이근도 감당했던 일이기에.

정의와 명예 따위는 안중에 없고 진영 대결에만 매몰된 정치권도 비슷한 처지다. 집권 4년 차에 터져 나온 ‘권력형 게이트’ 의혹에 대응하는 청와대와 여권을 보라. 강기정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5000만원이 전달됐다는 의혹과 관련해 청와대는 검찰의 출입기록 제출 요청을 거부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법정 폭로가 나오자 3개월 만에 입장을 바꿨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했다고 설명했는데, 계산기 다 돌려본 뒤 내놓은 포석일 공산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추미애 장관의 법무부는 라임 사건에 대한 감찰을 전광석화처럼 진행하더니 느닷없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공격했다. ‘야권 정치인’ 관련 의혹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사상 유례없는 보도자료를 내면서다. 추 장관 아들의 특혜 휴가 의혹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법무부의 전투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국민 입장에선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라는 노래가 안 나오겠는가. 짜가가 판치는 요지경 세상이다.

김승현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