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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스마트폰 플래시 때문에 벌어진 도깨비 소동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61)

동네마다 혼자 사는 초고령 노인들이 많다. 어느 80대 남자 어르신은 새벽에 선잠이 깨면 벽을 보고 멍하니 있다가 문득문득 내가 죽어 있는 건지 살아 있는 건지 멍해지고 공허하다고 한다. 오래 살면서 겪는 길고 긴 외로움, 고독과의 싸움이다. 여성 어르신은 그나마 덜하다. 긴긴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방도 닦아보고 한쪽 구석에 꽁꽁 싸놓은 보따리를 풀어 다시 정리하여 새롭게 보관한다. 언젠가 시커먼 보따리가 장롱 위에 가득한 집을 방문하여 그것을 구경한 적이 있다.

남이 보기엔 케케묵은 쓰레기인데 어르신의 삶이 들어 있는 거라 버리라는 말은 차마 못 했다. 그날, 옛날 이야기하듯 물건의 사연을 주저리주저리 말씀하시는 걸 받아 적어 보자기 귀퉁이에 함께 넣어 놓았다.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자식들이 유물 정리를 하면서 그분의 삶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돌봄에 대한 감사전화를 받은 기억이 난다.

어르신의 애인은 TV다. 인간이 오래 사는 비결은 어쩌면 TV가 생겨서인지도 모른다. 홀로 되신 어르신들은 고독한 방에서 사람 사는 풍경을 보여주고 사람 목소리 들을 수 있는 TV가 애인이다. [사진 pxhere]

어르신의 애인은 TV다. 인간이 오래 사는 비결은 어쩌면 TV가 생겨서인지도 모른다. 홀로 되신 어르신들은 고독한 방에서 사람 사는 풍경을 보여주고 사람 목소리 들을 수 있는 TV가 애인이다. [사진 pxhere]

요즘엔 어느 집이든 개인 폰과 TV가 옆에 있어 오랜 시간 친구가 되어주니 다행이다. 과제물 숙제에 몰두해 있으려니 10시가 넘는 늦은 밤에 전화벨이 울린다. 이웃 어르신이다.

“애인이 또 죽었어야.”
“하하하. 그 애인은 예수님인가 죽었다 살아나길 벌써 몇 차례여.”

어르신의 애인은 TV다. 인간이 오래 사는 비결은 어쩌면 TV가 생겨서인지도 모른다. 연세 드시고 홀로 되신 어르신들은 삭막하고 고독한 방에서 사람 사는 풍경을 보여주고 사람 목소리 들을 수 있는 TV가 1순위 애인이다. 갑자기 그것이 먹통이 되어 응답을 안 하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도 캄캄한 방이 된다.

먹통이 된 TV는 명절 때 아들이 와서 최신형으로 바꿔 준거다. "리모컨에 입을 가까이 대고 '지니야, 티브이 켜'라고 말하라는데 '테래비 틀어라'해서 그런가. 이빨 빠져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인가. 자꾸 다시 말하라 하니 그년(지니라는 여성) 삐칠까 봐 혼자 놀아라. 난 괜찮다" 말해주었단다. 하하.

번호 하나만 누르면 켜지게 빨간색으로 리모컨 전원을 동그라니 표시해놓았다. 그런데 가끔 두툼한 손가락으로 셋톱박스나 다른 버튼이 잘못 눌러지면 어르신은 '멘붕'에 빠진다. 다시 잘못 누르면 뒤죽박죽이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나를 호출하신다.

얼마 전엔 더 재밌는 소동도 있었다. 한 어르신이 새로 사다 준 폰을 누르다가 그만 플래시가 켜졌다. 머리맡에 겨울이불을 덮어 놓아도 도깨비불 같았다. “우야노~우야노~”하며 호들갑인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갖다 버려라’ 고함을 치셨다. 조용히 마당 한쪽에 내다 놓았다(할아버지는 지금도 폴더 폰이다). “깜깜한 밤에 창밖에 보이는 도깨비불 때문에 잠은 더 안 오고 그래서 불렀어야.”

한 어르신이 새로 생긴 폰을 누르다가 그만 플래시가 켜졌다. 머리맡에 겨울이불을 덮어 놓아도 도깨비불 같았다. ’우야노~“하며 호들갑인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갖다 버려라’ 고함을 치셨단다. [사진 pixabay]

한 어르신이 새로 생긴 폰을 누르다가 그만 플래시가 켜졌다. 머리맡에 겨울이불을 덮어 놓아도 도깨비불 같았다. ’우야노~“하며 호들갑인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갖다 버려라’ 고함을 치셨단다. [사진 pixabay]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났다. 안절부절 미안해하는 모습이 눈빛에서 달려 나온다. 폰을 켜서 손을 붙잡고 “커튼(커튼이 어딧노??)을 요렇게 내리면 요런 게 나오지요? 이 그림을 찾아 누르면 꺼져요”라고 설명을 한다. 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언제든 달려올 테니 자꾸 해보라 한다. 어르신은 그날의 밤 호출이 아직도 미안해서 아침에 현관문을 열면 채소와 과일이 가끔 놓여있다. 소박한 행복이다.

어려운 환경을 스스로 개척하며 우리를 키워주신 천하무적 부모님도 스마트시대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잠이 안 오는 긴긴밤, 서글픈 과거 속의 보따리를 꺼내 다시 싸고 푸느니 스마트한 세상의 미래 보따리를 펼쳐 눌러 보는 게 백번 낫다며 추켜세운다. 쪼그마한 신세계를 들고 “살다 살다 희한한 커튼을 다 본데이”라며 호기심 천국으로 빠져드는 어르신들을 보노라면 24시간 대기조로 지내도 마냥 즐겁다.

요즘은 코로나로 나도 신식 수업을 듣는다. '줌, 미트'라는 기계속의 대화방에서 선생과 학생이 비대면 수업을 한다. 이 또한 새로운 세상에 접해보는 신세계다. 나이 들어 문지방만 넘으면 배운 걸 다 까먹고 허둥대지만 살아가는 동안은 배우고 또 배워서 신기한 첨단 세상의 틈새에 끼여 살고 볼 일이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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