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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타인에게 ‘그 사람’으로 기억되는 우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41)

얼마 전 추석이 지나갔다. 이번 명절은 코로나19 감염 위험 때문에 서로 오가지 못한 이도 많았을 것이다. 나 역시 이동하지 않고 집에서 지냈다. 양가 어른의 결정 하에 조용히 지내기로 하고 보니 전화로 안부 나눌 곳이 더 많았다. 친정 언니와 명절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몰랐던 나의 이야기를 뜻밖에도 언니를 통해 들었다.

언니에게 전해 들은 내용에 따르면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며 보내고 있을 시간에 붉은 방점이 찍혔다.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한 부분이 내 뇌리에 둥둥 떠다녔다. 여기서 ‘그 사람’은 나의 아주 가까운 친척 중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이 마음이 넓어 부족했던 내 행동의 오점을 덮어준 것으로 말하고 있었다. 오해 속에 갇힌 그가 나를 보며 살아왔을 시선은 알고도 남았다.

‘아니 내가 왜, 그런 오해를 받으며 살아야 하지?’ 기분 참 꿀꿀하고 답답했다. 굳이 말하자면 긴 세월 동안 그 사람의 옳지 못한 언행을 오히려 내가 많이 덮어주었고, 그를 이해하려 애쓰며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이것은 온 가족이 다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고 하늘도 다 봐서 알고 있는 일이다. 그 사람이 나와 내 부모에게 저지른,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많은 부분을 조용히 덮고 사는 것도 오히려 나와 가족들이었다. 생각하니 점점 불쾌함과 억울함이 고개 들었다.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며 보내고 있을 시간에 붉은 방점이 찍혔다.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한 부분이 내 뇌리에 둥둥 떠다녔다. [사진 pixnio]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며 보내고 있을 시간에 붉은 방점이 찍혔다.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한 부분이 내 뇌리에 둥둥 떠다녔다. [사진 pixnio]

‘지금이라도 그 사람에게 전화해서, 그가 나에 대해 잘못 판단한 오해를 투명하게 풀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일 년도 더 지난 일이니 세월이 해결해주길 바라야 하나? 너무 늦게 알았어. 이제 와서 긁어 부스럼 만들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그 사람은 언니에게 내 이야기를 (그런데도 자신은 다 이해하기로 했다는 말과 함께) 편집적으로 전달해 놓고 정작 자신은 그 이야기 자체마저 까맣게 잊고 살지도 모를 일이야. 내가 그 사람에게 전화해 그 일을 다시 꺼내고 설명했을 때 서로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 것일까? 타인의 오해에서 풀려날 나의 자유를 찾아야 하지 않나? 그냥 적당히 그의 기억 속에서, 나는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는 것도 조용히 보내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몰라. 아니야, 아닌 것은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주어야 해. 내가 왜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으며 살아가야 해? 몰랐으면 모를까, 이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을 무수히 용서하고 이해하며 하며 살아온 것은 나인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런 생각으로 나를 오해하며 내 언니에게 말했을까?’

당장 전화해서 못 풀 것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김빠진 콜라를 대하는 기분이다. 그 오해를 풀려면 그 시절로 돌아가 처음부터 세밀히 되짚어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그 사람이 감추고 사는 민낯도 낱낱이 꺼내야 순서상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소 번거롭기도 하다. 전화? 아직 못했다. 내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추석 이후 내 안으로 불시착한 ‘그 사람’이라는 택배 상자. 참 계륵 같다.

그 사람은 왜 그 당시 바로 내게 직접 전화해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내게 알아보지도 않고 나를 나쁜 사람으로 정해 놓고 자신이 나를 용서했다고, 내 언니에게 말했을까? 왜 나는 누군가의 섣부른 재단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일까?

이제 와서 그에게 전화해 풀자니 피곤하고, 묻어두자니 그 사람이 나를 오해하며 살아갈 남은 시간 속의 내 모습이 참 찜찜하고 불쾌하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경우를 심심치 않게 겪는다. 사람들 속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 갑자기 또는 우연히 많은 사람과 만나고 일이 생긴다. 지인과의 대화 속에 갑자기 등장하는 ‘그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나의 또 다른 모습’도 냉장고 안쪽 상한 음식처럼 뒤늦게 발견된다. 어떤 경우는 즐겁게 약속하고 모이는 행복한 만남도 많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렇게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 ‘그 사람’은 나이고 당신이다. 누군가의 가족이고 누군가의 부모이고 자식이거나 형제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시간이 가고. 어느 날 돌아보면 늘 그곳에 서 있을 것만 같던 그 사람이 죽고 없다. 연기처럼 그 사람이 사라진다. 믿기 힘든 일이 지금 이 시각에도 무수히 생겨나고 있다.

'그 사람'과 당장 전화해서 못 풀 것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김빠진 콜라를 대하는 기분이다. 그 오해를 풀려면 그 시절로 돌아가 처음부터 세밀히 되짚어 나와야 한다. [사진 pixnio]

'그 사람'과 당장 전화해서 못 풀 것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김빠진 콜라를 대하는 기분이다. 그 오해를 풀려면 그 시절로 돌아가 처음부터 세밀히 되짚어 나와야 한다. [사진 pixnio]

그 사람, 그 여인, 그 아이, 그 텅 빈 행간과 마주할 때가 꼭 오고야 마는 게 인생이다. 더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 사람. 오직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고, 웃고, 말을 하는 다양한 ‘그 사람’들. 그 사람은 누군가의 가족일 수도 있고 부모나 형제 또는 친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너나없이 마지막이 기다린다. 사람이 죽으면 한 줌 흙이 되어 땅에 묻히거나 한 줌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간다. 그리고 나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 ‘그 사람’이 되고, 비로소 생을 완전히 마감한다.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영원히 남게 될까? 내가 아는 나와, 그들이 기억하는 나. 망자는 말이 없을 테니 싫든 좋든, 훗날 나를 기억해 줄 그들의 의식 속 ‘그 사람’이, 내 모습이 되고 만다.

어느 날 갑작스레 내 집 앞에 배달된 검은 택배 박스 하나. 스카치테이프로 칭칭 감아놔 도무지 풀기도 쉽지 않은 짜증 나는 물건. 그러나 내 손으로 직접 하나하나 풀어야 하는 물건. 그런 택배를 받은 기분이다. 나는 계륵 같은 이 물건을 밖에 둘 수 없어 일단 내 안으로 갖고 들어왔다. 내 마음속에 있는 현관 한쪽에 밀쳐두고 불청객 같은 이 상자를 오래 내려다본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잘못 그려진 내 모습을 바로잡아야 할 때가 있다.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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