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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일하는’ 엄마의 새벽 알람은 주인집 괘종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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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40)

예전에는 가장 귀했던 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나의 엄마가 젊었을 때 괘종시계는 부의 상징이었다. [사진 pxhere]

예전에는 가장 귀했던 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나의 엄마가 젊었을 때 괘종시계는 부의 상징이었다. [사진 pxhere]

나의 엄마가 하시는 말씀 중 괘종시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모든 물건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예전에는 가장 귀했던 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물건이 그 자리를 대신하곤 한다. 나의 엄마가 젊었을 때 괘종시계가 부의 상징이던 시절 이야기다. 손목시계가 최고의 결혼예물이던 그때. 졸업과 입학 선물로 손목시계가 등장한 것도 한참 후의 일이다. 그 당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엄마는 어느 집 문간방을 하나 얻어 월세를 사셨다. 자식들 공부도 넉넉히 못 가르치고 일터로 보내야 했던 그때. 엄마도 함께 새벽밥을 먹고 벽돌공장으로 나가셨다. 매일 새벽밥을 짓고 엄마 도시락까지 세 개를 싸야 하는데 집 안에 시계가 없었다고 한다.

시골 같으면 새벽닭이 홰를 치며 울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창 개발 중이던 도시 변두리에서 닭울음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집에 시계가 없다 보니 새벽이면 일어나 주인집 벽에 기대어 조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는 엄마. 바람벽 저 너머에서 괘종시계가 종을 한번 치면, 이것이 새벽 한 시인지, 아니면 30분을 가리키는 소린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또 꾸벅꾸벅 졸며 기다렸다가 그다음 괘종소리를 들어봐야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또 뜬눈으로 자는 둥 마는 둥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가 새벽 4시를 치는 소리가 들리면 일어나 연탄불에 밥을 짓고 도시락 싸고 두 아이에게 버스 토큰을 나눠주고, 새벽 첫차를 타고 일터로 달리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오신 엄마가 지금은 시간만 나면 유튜브를 보신다. 새로 산 스마트폰 사용법을 몰라, 딸과 사위에게 수없이 전화해 익히고 돌아서면 또 까먹고 다시 전화해 묻고 익히기를 여러 번. 이제는 사위가 운영하는 유튜브를 구독 신청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혼자 찾아보신다. 어느 날 내가, 왜 그렇게 그걸 열심히 보시느냐고 물었다. 시청시간과 조회 수라도 올라가 사위에게 작은 도움 되라고 유튜브를 본다는 것이었다. 마을마다 이장 댁에 겨우 한 대씩 있어, 밤중에도 전화 받으러 맨발로 내달렸던 세대를 넘어온 엄마가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계시니, 참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상상도 못 했던 코로나19 전염병이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다. 처음 이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머잖아 잦아들겠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우리의 방심을 농락하듯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기피한 채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없는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디고 버티고 이겨내는 중이다.

얼마 전 우연히 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네 식구 중 아버지를 포함해 셋이나 직장에서 잘렸다는 사연이었다. 어머니가 버는 수입으로 겨우 버틴다는데 그마저도 얼마나 갈지 몰라 몹시 불안하다고 했다. 댓글을 보며 참 가슴이 아팠다. 또 다른 댓글에서는 20대부터 60대 각 세대 간에 누가 가장 고생한 세대인가를 놓고 각자 입장에서 뜨거운 논쟁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얼마 전 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네 식구 중 아버지를 포함해 셋이나 직장에서 잘렸다는 사연이었다. 어머니가 버는 수입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고 했다. [뉴시스]

얼마 전 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네 식구 중 아버지를 포함해 셋이나 직장에서 잘렸다는 사연이었다. 어머니가 버는 수입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고 했다. [뉴시스]

고생한 엄마 세대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지만, 나 역시 적잖이 고생하며 버텨온 오십 대다. 그러나 하나하나 세대별로 사정을 읽어보면 참 어느 세대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난감하다. 오늘 아침에 ‘위기는 곧 새로운 발전과 변화의 기회’라고 말한 어느 대기업 회장에 대한 기사도 눈에 띄었다.

어쩌면 특정 세대만이 아닌, 함께 살아내는 매 순간이 위기와의 싸움이 아닌가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은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닐까? 지금 문득 든 생각이다. 말해놓고 보니 제법 그럴싸하다. 이제는 흔해진 말 중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는 말이 있다. 오늘은 유독 그 말이 마음에 오래 가라앉는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환경은 또 한 번 대격변을 치르는 중이다.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그 어느 때보다 급변하는 시대를 사는 기분은 나만의 느낌일까? 훗날 이 시기를 돌아보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저마다의 사연을 떠올리게 될까. 요즘 모두가 힘들다. 그래도 어쨌든 끝까지 살아남고 견뎌보자고 응원해본다.

「자명종 시계」 - 김명희

한 세월이 모두 빠져나간 안은 어둡다

충전되었던 저간의 세월을 모두 바닥낸 채

내장 몇 잘그락거리며 해묵은 장식품이 되었다

언제인가, 몇 시 근처의 추억인지는 모르지만

한때 저 안엔 날품을 팔던 가장의 새벽과

아들의 등교를 덮은 단잠 안쪽으로

불청객처럼 뛰어들던 금속질 굉음이 들어 있었다

예전에 어머니의 자명종은
옆집과 맞붙어 있던 바람벽이었다고 한다

그쪽 벽에 뜬눈을 기대어 놓고서
시계소리로 아침밥을 안쳤다는 이야기도

이제는 저 안쪽 희부연 먼지들의 몫일 뿐

늙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명종보다 보잘 것 없는 슬픔일지도 모른다

저 속에서 어머니는 오차도 없이 늙어갔고

내 안의 부주의한 건망증 또한 성장했다

유행 지난 세간처럼 삶의 기억들도 추억의 목록들도

흐릿해진 그 속에서 각질 같은 습관들만 비루먹다

어둠 속에서 숨을 놓았을 저 몸체

지금은 마지막 전생을 덜그럭거리고 있다

등 굽은 그 안은 어둡다

그렇다면 화려하게 물러난 음지들이야말로

우리들의 추억을 얼마나 저장하고 있다는 말인가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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