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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북한 눈치 보며 끌려다니는 문 대통령, 실망스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피격 사망한 해양수산부 공무원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대단히 송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무리 분단 상황이라고 해도 일어나서는 안 될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라며 “희생자가 어떻게 북한 해역으로 가게 됐는지 경위와 상관없이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사건 발생 엿새 만에 처음 나온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지만, 북한군의 만행을 규탄하거나 정부의 대응 소홀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는 없었다. 이번 사건을 대하는 대통령의 인식과 정부의 시각이 드러난 것으로, 실망을 넘어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엿새 만에 “송구하다”했지만 북한 규탄은 없어 #실종 사건쯤으로 호도하며 김정은 칭송 바빠

이번 사건의 본질은 북한군에 의해 저질러진 대한민국 국민의 피격 사망 사건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어떻게 북한 해역에 가게 됐는지…”라며 마치 월북을 시도하다 빚어진 실종사건쯤으로 호도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이 북한이 보냈다는 전통문에 대해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서 곧바로 직접 사과한 것은 사상 처음이며 매우 이례적”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며 오히려 고무된 모양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고 선서했던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또 “이번 비극적 사건이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대화와 협력의 기회를 만들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계기로 반전되기를 기대한다”며 남북 군사통신선 복구를 희망했다. 국민의 분노엔 눈 감고 이참에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려는 것이다. 대통령의 임무를 망각한 비상식적 발언이다. 북한 측 주장에 휘둘려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민이 우선인지, 북한이 우선인지 헷갈릴 정도다.

피격 사건이 발생한 22일 이후 지금까지 문 대통령은 현장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열린 두 차례의 관계장관회의에 문 대통령은 모두 불참했다. 사건 발생 113시간이 지난 27일 오후에야 처음으로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주관했다. 문 대통령은 “이씨가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국회의 행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여야는 어제 이번 사건 관련 대북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려고 했지만 민주당이 ‘시신을 불태웠다’는 문구를 문제삼고 나서면서 회의 자체가 무산됐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도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민주당 의원들이 느닷없이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과 ‘북한 개별관광 촉구 결의안’ 등을 상정한 것이다. 야당 의원들이 반발하자 회의가 중단된 상태다. 국민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도 관광을 재개하고, 종전선언을 촉구하자는 게 제정신인가. 국민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고 이마저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집권당의 몰염치는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다. 이러고도 국회가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존재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