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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투병 이주일씨 "울고 웃긴 30년 후회 없어요"

중앙일보

입력

부슬비는 새벽부터 계속 내렸다. 분당으로 가는 길은 비에 젖어 있었다. 29일 아침. 새마을연수원을 지나 아름드리 나무들이 양 옆으로 우거진 국도를 타고 차로 10분쯤 달리니 그가 10여년 동안 가꿔온 농장이 있었다.

한쪽 벽면을 대형 유리로 만든 단층건물 응접실. 낡은 소파 위에 그가 누워 있었다. 코에 산소공급장치를 낀 채였다. 힘든 몸을 일으켜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기운이 없었다.

이주일(61.본명 鄭周逸)씨. 한국을 대표하는 코미디언인 그가 지금 투병 중이다. 폐암이라고 한다. 준비 중이던 연말 공연도 취소한 그의 얼굴은 핼쑥했고 하얀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기침이 계속 나길래 지난 여름에 종합검진을 했어요. 이상이 없다기에 그전처럼 운동도 하고 술도 많이 마시고 했는데…. 불과 한달 전에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굳이 외국으로 나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주치의의 만류에 따라 일산의 국립암센터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부인 제화자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터뷰는 되도록 짧게 하고, 사진은 절대 찍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계속 기침을 했다. 숨가쁜 기색이 역력했다. 대화는 계속 끊어졌다.

그의 농장에는 특히 소나무가 많았다. 1백여 그루쯤 될까. 대부분 그의 고향 강원도에서 옮겨 심은 것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특히 키가 큰 대여섯 그루가 말라죽어 있었다.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주신 나무들이에요. 저게 바로 낙락장송입니다. 이상하죠. 鄭회장이 돌아가시고 나서 저놈들이 다 시들어 죽었어 요. 그것 참."

씁쓸한 얼굴로 마른 나무들을 쳐다보는 그의 뒤편 벽에는 큰 사진이 한장 걸려 있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당시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그가 서울 대학로를 힘차게 달리는 모습이다. 그는 당시를 설명하며 사진 속의 건강한 자신을 한동안 쳐다봤다.

"어떻게들 알았는지 정말 많은 분이 찾고 전화를 주십니다. 선후배는 물론 전국 곳곳의 각계각층 팬들이 격려를 해주시고…. 야, 내가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인간 이주일이가 그런대로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응접실 한쪽에 가수 하춘화씨가 가져온 양란(洋蘭)이 하나 있었다. 양란은 보라색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부친 하종오옹이랑 같이 왔더만요. 두 분 다 저를 보자마자 껴안고 울고…. 올해 여든살 되신 하옹이 '자네가 나를 돌봐야지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하시더군요. 하춘화씨를 품에 안고 극장에서 도망나온 이리역 폭발사건 때(1977) 내가 서른일곱살이었어요. 무명이었죠."

서울 금호동 판잣집에서 살며,시골 극장에서 가마니 위에 앉은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하던 그다. 오랜 무명생활 끝에 마흔살이 되던 80년 TBC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비로소 유명해졌다.

"한 30년 남짓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며 살아왔네요. 후회요□ 없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그는 요즘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자서전을 쓰고 있다고 했다. "글을 쓰다 보면 그래도 아쉬움이 있겠다. 자제분 생각도 새삼 다시 나시겠다"고 던진 질문은 너무 잔인한 것이었다.

교통사고로 어린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외아들을 한시도 잊을 리 없는 그다. 눈가가 떨리며 희미한 미소로 답을 대신하는 것을 보며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이후 그의 눈길은 그가 가장 아끼는 외손녀 채은이(7)를 네살 때 농장에서 안고 찍은 사진에 줄곧 머물렀다.

정치 이야기도 나왔다. 14대 국회의원을 끝내며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고 일갈했던 그다.

"정치요. 정말 웃깁디다. 당시 같은 당에 있던 김동길 교수의 말이 가장 기억나요. '鄭의원, 이거 정치판 우리가 올 데가 아니었어요'라며 고개를 흔들더군요."

그에게 무대는 삶 그 자체였다. TV와 스크린에서 만나는 그도 뛰어났지만, 무대에서 그는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는 평을 듣곤 했다.

"지금도 무대에 설 때면 참 긴장해요. 두시간 공연하면서 담배 한갑을 다 피우니까요. 올 연말 공연에서는 하춘화씨랑 70년대 전국을 돌 때 무대를 재연하려고 했는데…."

해마다 김장철이면 그의 농장은 김장축제가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장독을 20여개나 땅에 묻을 만큼 갖가지 김치를 듬뿍 담가두고 겨우내 이웃 노인들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 김장축제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가 먼저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사진 한장 찍어야지"라며 촬영을 권했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수척한 그의 얼굴과 함께 지난 세월의 영욕이 가득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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