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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메가폰 처음 잡은 2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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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을 넘어선 올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영화배우로, 연극연출가로 낯익은 두 사람이 감독 데뷔작을 들고왔다. 아시아 영화에, 한국 영화에 새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대만 배우 리캉생(李康生)과 연극 ‘오구’를 영화로 만든 이윤택씨 두 사람의 시도를 소개한다.

*** '不見'의 리캉성

" "영화 보셨나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리캉성(35)은 기자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제8회 부산영화제에서 그가 선뵈는 영화는 두 편. 데뷔 이후 10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차이밍량(蔡明亮) 감독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에 그는 여전히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질문이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감독 데뷔작인 '불견(不見)'이었다.

'불견'의 영어 제목은 'The Missing', 즉 '실종'이다. 영화의 전반부만 보면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공원에서 세 살짜리 손자를 잃어버린 할머니의 이야기인 듯 싶지만, PC방에서 밤새워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던 또다른 주인공인 10대 소년 역시 뒤늦게 치매기 있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아나선다. 어두컴컴한 공원의 전경을 비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란히 주저앉은 두 인물의 처연한 모습은 현대인의 단절과 고독을 한눈에 보여준다.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애절함을 표현하기는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도 마찬가지다. 고전 무협영화 '용문객잔'을 상영하는 낡은 극장의 텅 빈 객석과 짝사랑하던 영사기사(리캉성)에게 끝내 말 한마디 걸지 못하는 다리를 저는 여성의 뒷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진다.

리캉성 감독은 "두 영화는 본래 '불견불산(不見不散)'이라는 한 작품으로 묶으려던 것인데, 차이밍량의 작업이 길어지는 바람에 각각 다른 영화가 됐다"고 말했다. '불산불견'은 상대가 올 때까지 꼭 기다리겠다는 인사말이라고 한다.

두 편의 영화는 이런 주제뿐 아니라 롱테이크를 좋아하는 스타일도 닮았다. '불견'에서 할머니가 실제로 공원에 놀러온 사람들을 이리저리 붙잡고 손주의 행방을 묻는 장면은 무려 10여분 동안 커트 한 번 없이 이어진다. 리캉성 감독은 "할머니의 절절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감춰두고 찍었다"면서 "사람들이 손주를 찾았다며 어린 아이를 데려오는 해프닝도 벌어졌다"고 소개했다.

리캉성은 "차이밍량은 나의 스승"이라면서도 "그의 영화와 달리 내 영화는 사람들이 중심"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안녕, 용문객잔'은 대사 몇 마디 없는 인물들보다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낡은 극장의 풍경이 주인공인 반면 '불견'은 감독 자신의 체험이 녹아 있다.

그는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년에 혼자 집을 지켜야 했던 일이나 이후 어머니가 봐주던 어린 조카가 공원에서 다쳐 가슴을 쓸어내렸던 일이 모티브가 됐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이들 영화의 양쪽 가정 모두 조부모와 손자 사이의 중간세대가 등장하지 않는데, 감독은 생업에 바쁜 이들 세대에 대해 "부모도, 자식도 돌보지 않는 세대"라고 말했다.

'불견'은 부산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됐고, 대만에서는 연말에 개봉할 예정이다.

*** '오구'의 이윤택

영화 '오구'가 상영되는 극장의 풍경은 '젊은이의 축제'로 알려진 부산영화제의 다른 극장들과는 사뭇 달랐다. 연극'오구'를 통해 이미 웃기고 울리는 한판 굿에 매료됐던 중장년 관객이 곳곳에 자리해 20대부터 고른 연령층이 객석을 메웠기 때문이다.

'오구'는 시인으로, 드라마 작가로, 연극연출가로 그래서 '문화게릴라'로 알려진 이윤택(51)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야기는 죽은 남편의 꿈을 꾼 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한 황씨 할매(강부자)가 산사람의 혼을 위로하는 오구굿을 청하면서 시작된다. 원작인 연극은 1990년 부산 가맛골 소극장에서 선을 뵌 뒤 서울에 입성, 10년 가까이 장기 레퍼토리로 대히트를 했지만 '신인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작업은 제작비를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건 예술영화가 아니에요. 영화는 재미있어야지."

감독은 자신에 대한 충무로의 오해를 풀려는 듯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그가 좋아하는 영화로 예를 든 것은 '희극지왕'같은 저우싱츠(周星馳)의 코미디물. "황당하게 웃기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 명의 저승사자가 알몸으로 물에서 나와 저잣거리를 거쳐 인간세계로 접어드는 첫 장면부터 '너무 연극적이지 않으냐'고 물으려는 기자를 앞질러 "요새 '영화적'이라는 게 뭐냐"고 반문을 던졌다. "1백년 역사인 영화가 여기까지 온 건 2천년 역사의 연극에서, 문학에서 얻은 자산 덕분"이라면서 "'영화적'이라는 요즘 영화들이 조폭.멜로.코미디로 단순화돼 있다"고 맹공을 펼쳤다.

사실 그는 영화계에 낯선 인물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오세암''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등 오리지널과 각색을 가리지 않고 여러 편의 시나리오가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 등에 업혀 존 웨인의 서부극을 본 이래로 영화는 내 꿈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도 영화와 연극이란 매체의 차이는 인정한다. '현재형 예술'인 연극'오구'의 성공비결이 무대와 동시에 웃고 우는 관객의 동참이었던 반면, 실체가 아닌 영상을 보여주는 영화는 엄연한 '과거형 예술'이고 관객과도 이성적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는 원작에 없던 드라마를 가미했다. 무당의 딸로 태어난 미연(이재은)을 둘러싼 마을의 추문이 굿을 계기로 드러나고, 그런 미연을 마을 사람들이 감싸안는 것으로 굿판의 본래 의미인 화해를 살렸다는 설명이다.

그는 "여러 세대가 두루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남기고 국립극장에서의 '햄릿'공연이 예정된 서울로 떠났다. '오구'는 극장가에서는 다음달 말 개봉할 예정이다.

사진=송봉근 기자, 부산=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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