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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개국 몰린 세계 첫 여성 지휘자 대회…한국인도 최종 6인에

중앙일보

입력

'라 마에스트라' 콩쿠르에 참가해 최종 6인에 포함됐던 한국계 지휘자 최현. [사진 필하모니 드 파리]

'라 마에스트라' 콩쿠르에 참가해 최종 6인에 포함됐던 한국계 지휘자 최현. [사진 필하모니 드 파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콩쿠르 ‘라 마에스트라’가 18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파리의 공연장인 필하모니 드 파리가 여성 지휘자 만을 대상으로 개최한, 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자 대회였다. 전세계 51개국에서 참가한 여성 지휘자 220명은 현재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여성 지휘자의 파워를 상징했다. 파리에 거주하는 음악평론가 김동준씨가 콩쿠르의 의미와 결과를 본지에 기고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최초로 여성 단원이 들어간 것은 1982년이었다. 많은 사람이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를 떠올리지만, 같은 해에 바이올리니스트 마들렌 카루조도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단했다. 카루조는 당시 취리히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수석 오디션을 봤지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수석 자리를 내주지 않자, 베를린 필의 평단원으로 입단했다. 오늘날 베를린 필은 여성 단원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가운데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바이올린 수석인 곳이 상당수가 되었다.

파리에서 열린 '라 마에스트라' 콩쿠르 현지 참관기

그러나 지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 지휘자 가운데 여성은 불과 5% 정도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빠른 속도로 변모할 것이다. 전세계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여성 지휘자들의 수는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실제로 이들의 활동도 과거보다는 훨씬 늘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좀더 공격적으로 바꿔보려는 의지가 ‘라 마에스트라’ 콩쿠르를 낳았다. 세계 최초로 열린 여성 지휘자를 위한 콩쿠르다. 현 파리 필하모니의 총책임자인 로랑 바일과 파리 모차르트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인 여성 지휘자 끌레르 지보가 힘을 합쳤다. 끌레르 지보는 과거 베를린필을 이끌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어시스턴트 지휘자였지만, 프랑스에서 여성 지휘자로서 활동의 어려움을 느껴, 2011년 파리 모차르트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또한 그녀는 정치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본래 3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이 콩쿠르는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돼 이달 15일에서 18일(현지시간) 사이에 파리 필하모니에서 열렸다. 전세계 51개국에서 220명의 여성 지휘자가 지원했고, 그 가운데 12명을 선정했다. 12명 가운데 6명이 중간결선에, 그리고 최종 결선에 3명이 올라갔다. 콩쿠르 측은 12명에게 2년 동안 다양한 지휘 기회와 마스터 클래스 참가 기회를 만들어 주는 아카데미를 운영할 계획이다.

나이 제한은 두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나이가 많은 참가자는 47살의 스웨덴 지휘자 마리 로덴미르였다. 12명의 본선 참가자의 평균 연령은 30대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대부분이었다.

1차 예선에서 참가자들은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을 포함한 네 곡의 서곡 가운데 한 곡을 선택할 수 있었고, 20분의 연습과 지휘를 통해서 6명을 선정했다. 6명의 지휘자는 최현(29ㆍ한국-미국), 라이 지아징(29ㆍ중국), 통 레베카(35ㆍ인도네시아-미국), 리나 곤잘레즈(34ㆍ콜롬비아), 스테파니 차일드레스(21ㆍ영국-프랑스), 글라디스말리 바델(25ㆍ베네수엘라)이었다.

우승한 지휘자 통 레베카. [사진 필하모니 드 파리]

우승한 지휘자 통 레베카. [사진 필하모니 드 파리]

최종 결선에는 통 레베카, 스테파니 차일드레스, 리나 곤잘레스가 선정돼 파비오 바키의 곡인‘Was Beethoven African?(베토벤은 아프리카인이었을까?)’, 바르토크의 디베르티멘토 가운데 ‘알레그로 아사이’ 악장,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의 마지막 악장,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지휘했다.

18일 연주회 형식으로 열린 결선에서 세 지휘자의 역량은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 예선부터 매우 차분하고, 지적인 지휘를 한 영국의 차일드레스는 베토벤 ‘영웅’을 평범하고, 단조롭게 지휘했다. 무엇보다도 강렬한 대조가 생명인 베토벤을 제대로 해석할 내적인 에너지와 역량이 부족했다. 콜롬비아의 곤잘레스는 중간 결선까지는 확신이 넘치는 지휘를 했는데, 결선에서는 바르토크를 제외하고는 과연 결선에 오를만한 역량의 지휘자였는지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확신이 부족한 평범한 지휘를 했다.

통 레베카는 간혹 필요 이상으로 큰 동작으로 지휘하고, 오케스트라를 연습시킬 때, 순발력은 있었지만, 음악적 설득력이 부족한 단편적 방식이어서, 세 명의 아시아 여성 지휘자 가운데, 과연 결선 진출자로 결정된 것이 심사위원들의 옳은 판단이었는가 하는 회의도 있었다. 하지만 결선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었다. 파비오 바키의 현대곡을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음악적으로 지휘했고, 무엇보다도 베토벤의 ‘영웅’을 차일드레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고, 강렬한 대조의 해석으로 들려주었다. 같은 오케스트라인지 의심될 정도로 전혀 다른 소리를 뽑아내서, 지휘자에게 기대하는 음악적 역량의 확신을 주었다. 그는 결국 우승의 영광을 얻었다.

최종 12인에 들었던 한국 지휘자 김유원. [사진 필하모니 드 파리]

최종 12인에 들었던 한국 지휘자 김유원. [사진 필하모니 드 파리]

사상 최초로 열린 여성 지휘자 콩쿠르인만큼 미숙한 면도 있었다. 콩쿠르 측에 220명의 참가자의 국가별 분포도에 대한 관련 정보를 수 차례 요청했지만, 콩쿠르 측은 51개국에서 참가했다는 사실 외 더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는 모든 국제 콩쿠르가 지원자 상황을 알리는 기존의 관행과는 거스르는 것이다. 심사위원 구성도 국제 콩쿠르에는 걸맞지 않는 것이었는데, 장-클로드 카자드쉬를 포함한 네 명의 프랑스 지휘자와 마린 알솝을 포함한 세 명의 미국 지휘자 그리고 심사위원장은 지휘자가 아닌 폴란드 라디오 국립 오케스트라의 대표인 에바 보거즈-모어였다. 콩쿠르 측은 코로나 사태로 심사위원들의 참석이 어려웠다고 해명했지만, 콩쿠르 참가자들은 현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두 파리에 올 수 있었다.

입상자 외에도 여성 지휘자의 진취성을 보여주는 참가자는 많았다. 결선에는 오르진 못했지만, 베네수엘라 지휘자 글라디스말리 바델은 이번 콩쿠르에서 가장 화제가 된 지휘자다. 예선에서 신들린 듯이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을, 마치 구스타보 두다멜을 보는 것처럼 지휘했다. 또한 오케스트라가 주는 상을 받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가장 많이 웃게 한 지휘자이기도 했다.

한국의 두 참가자 중 최종 6인에 들었던 최현은 활달하고 시원한 제스처, 기쁨에 충만한 얼굴로 지휘를 했다. 그는 “분명히 부정과 긍정의 양면을 지닌 콩쿠르이며, 개인적으로는 남성을 제외시키는 콩쿠르가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이 콩쿠르의 출발점이 된 끌레르 지보가 남성 지휘자 중심의 음악계에서 겪은 일을 들으면서 그녀의 뜻이 이해가 되었다”고 말했다.

우승자 통 레베카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여성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대해서, “여성으로서 지휘대에 오른다는 것이 남성 지휘자보다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는 어려운 일이지만, 현재 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음악적 재능이 넘치는 수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활동할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중간결선, 결선 진출자 발표가 났을 때, 이들 여성 지휘자들은 자신들이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껴안으면서 진심으로 기쁨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어려운 길을 걷는 동지로서의 이들 여성 지휘자들이 나누는 우정 속에 어쩌면 우리 음악계의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파리=김동준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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