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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나 잡아 봐라’는 피의자에게 조롱당하는 수사기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최근 한국미래발전연구원(미래연) 회계 부정을 폭로한 제보자가 “나도 공범이다”며 자수서를 제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권 실세가 관련된 사건은 눈치만 보며 시간 끌기에 급급한 검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윤건영 수사 뭉개자 제보자 “나도 처벌해 달라” 자수 #해외 도피 윤지오 영상 올려도 검경 “소재 모른다”

제보자가 지난 5월 공개한 의혹은, 2011년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이 미래연 기획실장을 맡았던 시기에 직원 명의 통장을 여러 개 만들어 차명 거래를 했다는 내용이다. 제보자는 백원우 의원실에 인턴으로 허위 등록해 미래연에서 받아야 할 급여를 백 의원실에서 받은 사실도 고백했다.

지난 6월 한 시민단체가 이 의혹을 검찰에 고발해 서울남부지검에 배당됐다. 지난 국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보좌관을 허위 등록했다가 타격을 받은 정치인이 여럿이다. 자유한국당 이군현 전 의원은 보좌관을 허위 등록해 급여를 준 뒤 돌려받은 혐의 등으로 2018년 징역형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번 사건의 경우 당사자가 급여통장 등 증거까지 공개한 만큼 수사에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검찰은 석 달 넘게 참고인 조사 한 번 하지 않았다. 지난달 제보자에게 “다른 사건이 밀려 조사를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 단지 주된 피의자가 여권의 실세 의원들이고, 수사하다 보면 이들을 둘러싼 불법 자금 거래가 드러날까 부담스러워 수사를 뭉개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보다 못한 제보자가 처벌을 감수할 테니 제발 수사 좀 해달라고 자수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검찰의 심각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법무부는 고 장자연씨 사건의 핵심 증인인 윤지오씨로부터 대놓고 조롱을 당했다. 윤씨는 억대의 후원금을 모은 뒤 이를 전용했다는 의혹이 일자 캐나다로 출국했다. 경찰은 지난해 10월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인터폴 적색수배자 명단에 올렸지만 아직 신병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유를 묻는 야당의 질의에 법무부는 “소재가 불분명해 지명수배한 상태”라고 답했다. 그런데 윤 씨는 캐나다에서 꾸준히 근황을 SNS에 올리고 있다. 얼마 전 게시된 생일파티 영상을 본 네티즌은 금세 도시와 호텔명까지 특정했다. 윤씨는 “집주소를 (수사기관이) 알고 있고, 집에서 생활한다. 공조를 요청한 것은 캐나다 경찰이고 거부한 것은 한국 경찰”이라고 밝혔다. 피의자는 ‘나 잡아 봐라’ 하며 활보하는데 검경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한심한 상황이다.

청와대가 인사권을 쥐고 있는 경찰은 과거에도 정권 뜻을 거스른 수사를 한 적이 없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최근 검찰 개혁을 명분으로 여권 인사를 수사한 검사들을 예외 없이 좌천시켰다. 그러니 아무리 뻔한 수사라도 누가 총대를 메고 나서겠는가. 이게 한국 검찰과 경찰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