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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땐 입 닫던 정치인, 코로나 시국에 목소리 커진 까닭

중앙일보

입력

재난지원금 지급을 두고 '보편 지급'과 '선별 지급'으로 의견이 달랐던 이재명 경기지사(왼쪽)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재난지원금 지급을 두고 '보편 지급'과 '선별 지급'으로 의견이 달랐던 이재명 경기지사(왼쪽)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에서 경제적 해법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곳은 금융·경제계가 아니라 정치권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지사는 지난 3월 재난기본소득을 처음 들고 나왔고, 이어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지사가 재난긴급생활비 등의 이름으로 논쟁에 참여했다. 최근 2차 재난지원금을 앞두고서는 차기 대권 주자가 맞붙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선별 지급이 신념”이라고 했고, 이재명 지사는 “(선별 지원은) 강제당한 차별”이라며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과거 경제 위기 때 경제적 해법을 논의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엔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주도권을 쥐었다. 시장과 금융권은 이 전 총재 입만 바라봤다. 한은의 독립성 때문에 정부와 정치권은 이 전 총재의 금리 인하 결정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외국도 중앙은행이 중심이었다. 전 세계 언론은 벤 버냉키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주목했다. 하지만 현 코로나19 위기에서 미국 국민은 제롬 파월 현 연준 의장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를 더 주목한다.

재닛 옐런(左), 벤 버냉키(右) 전 연준 의장 [중앙포토]

재닛 옐런(左), 벤 버냉키(右) 전 연준 의장 [중앙포토]

경제 위기 해법 논의의 중심축이 통화 당국에서 정치권으로 이동한 배경엔 변화한 경제 상황이 있다. 경제위기 해법으로는 크게 금리 인하와 재정 지출 확대가 있다. 금융위기 때까지만 해도 금리 인하를 통해 민간 수요를 늘려 경제 회복을 도와야 한다는 게 통화 정책 패러다임의 핵심이었다. 준비에서 집행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재정 정책의 역할은 보조적이었다.

금융위기 발생 당시 한국 기준금리는 5.25%였다. 금리 인하 카드가 아직 많이 남은 상태였다. 한은은 2008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다섯 번에 걸쳐 금리를 2.00%까지 내렸다. 미국의 경우에도 경제 회복의 주도권은 중앙은행에 있었다.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양적 완화를 했던 버냉키 의장에겐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지난 1월 국내 코로나19 첫 환자 발생 당시 기준금리는 1.25%에 불과했다. 한은은 두 번에 걸쳐 0.5%로 내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5월 0.5%로 기준금리를 낮추며 “기준금리가 실효 하한에 상당히 가까워졌다”고 했다. 사실상 더는 낮추긴 힘들다는 의미다. 금리 조정 카드를 잃은 중앙은행은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재닛 옐런 전 연준 의장도 지난 2월 “중앙은행은 탄약이 많지 않다. 심각한 경기 침체가 있어도 중앙은행은 상당한 대응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정부 입장에선 금리 카드가 힘이 빠지면서 자연히 재정지출 확대에 목을 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준금리 추이. 한국은행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0.50%로 동결했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기준금리 추이. 한국은행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0.50%로 동결했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8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전통적인 경제위기 대응 방식(금리 인하 등)이 소진됐고, 금융위기 때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게 증명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재정의 역할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는 “금융위기 때와 달리 코로나19 위기는 실물 경제 위기라는 점에서도 재정 정책이 더 주요한 정책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재정 지출은 정치적 결정의 문제다. 예를 들어 긴급 재정 지출 수단인 추가경정예산(추경) 집행을 위해서는 정부가 추경안을 짜고, 국회가 이를 승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정된 예산을 누구에게, 어떻게 지급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논의가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이념과 정치 철학의 문제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하준경 교수는 “재정 정책의 역할이 커지면 정치인의 목소리는 커진다. 단순히 정책 제안만 하는 것뿐 아니라 정치적 입지도 생각할 텐데, 그런 면에서 재정 지출은 정치적 이해관계랑 맞물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키움증권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가 지난 4월 13일 월간중앙 회의실에서 전세계 코로나19 감염 이후 경제전망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키움증권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가 지난 4월 13일 월간중앙 회의실에서 전세계 코로나19 감염 이후 경제전망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경제 위기 해법의 중심축이 전통적인 금리 중심의 통화 정책에서 재정 정책으로 이동하면서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홍춘욱 대표는 “경제 위기는 포퓰리즘 탄생의 계기가 되곤 한다. 표를 더 얻기 위한 방향으로 재정 지출을 결정하는 정치적 선택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꼭 재정 정책의 비중이 커져서라고 단정하긴 힘들지만, 정치인의 포퓰리즘이 계속 있었지만 그런 시도가 강화되는 게 경제적 위기 상황인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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