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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대화 없는 여성 캐릭터 그만…비주류 넘어 흥행 코드 된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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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 개막작은 '코로나 시대, 서로를 보다'란 주제로 공모한 1분 이내 50편 단편을 엮어낸 독특한 작품이 선정됐다. 영화제는 오는 10일부터 일주일간 서울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 개막작은 '코로나 시대, 서로를 보다'란 주제로 공모한 1분 이내 50편 단편을 엮어낸 독특한 작품이 선정됐다. 영화제는 오는 10일부터 일주일간 서울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개최된다. [사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근처럼 여성과 젠더가 우리 사회 주요 화두가 된 시기가 없었어요. 페미니즘 대중화란 표현이 적절합니다.”

오는 10일 개막하는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박광수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행사가 온라인으로 전환됐는데도 기대 열기가 뜨겁다면서다. 그에 따르면 개막 전 진행한 ‘씨네페미니즘학교’는 수강 신청 오픈과 동시에 대부분의 강좌가 마감됐다. 올해 지원작이 2배 넘게 늘어난 단편영화 제작지원 부문 ‘필름x젠더’을 비롯해 경쟁 부문인 ‘아시아 단편’ 등에서 역대 최다 출품 수를 갱신했다. 박 집행위원장은 “로카르노‧부산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영화제들이 여성 감독 작품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을 영화제 홍보에 사용할 정도로 여성 관련 내용이 시대 흐름이 됐다. 1997년 제1회 영화제 준비 당시 우리나라 여성 영화감독이 7명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라고 말했다.

제22회 여성영화제 출품작 '껑충' #4일 문체부 주최 '벡델데이 2020' #10년간 한국영화 성평등 되짚어

흥행코드 된 '여성' '페미니즘' 

‘여성’ ‘소수자’는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화두다. 영화진흥위원회 결산에 따르면, ‘벌새’ ‘윤희에게’ 등 페미니즘과 퀴어가 결합된 한국영화들이 올해까지 10만 관객을 잇달아 돌파하며 독립‧예술영화 시장에 여성 영화 붐을 일으키고 있다. 페미니즘 필독서로 꼽힌 원작소설로 인해 개봉 전후 평점 테러에 시달린 ‘82년생 김지영’은 논쟁이 오히려 흥행에 불을 붙였다. 라미란 주연 오락영화 ‘걸캅스’ ‘정직한 후보’도 언급할 만하다. 기존 남성 위주 형사‧정치 코미디의 성역할을 바꿔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며 여성 주연 영화의 가능성을 높였다. 블록버스터도 예외는 아니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주인공을 그린 영화 '82년생 김지영'. 동명 원작 소설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 타이완, 중국 등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주인공을 그린 영화 '82년생 김지영'. 동명 원작 소설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 타이완, 중국 등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기획 단계부터 ‘이건 별로인데’ ‘옛날이야기 같지 않아?’ 하는 것을 몇 가지만 쳐내도 자연스럽게 여성(캐릭터)들이 올라오더군요.” 연상호 감독의 좀비영화 ‘반도’를 제작한 이동하 레드피터 대표가 극중 자동차 액션을 시도한 모녀 캐릭터(이정현‧이레)에 대해 귀띔한 탄생 비화다. 민규동 감독은 “넷플릭스가 젠더 영역에서 다양한 콘텐트를 선보이는 이유도 소비하는 사람이 있고 돈이 되기 때문”이라면서 “대중이 좋아하면 변화는 따른다”고 했다.

지난 4일 온라인 중계된 '벡델데이 2020' 행사에 2부 사회자로 참석한 (왼쪽부터) 배우 김보라와 올해 '벡델리안'에 선정된 '벌새' 김보라 감독, 1부 심포지엄에 참석한 '우리집' 윤가은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지난 4일 온라인 중계된 '벡델데이 2020' 행사에 2부 사회자로 참석한 (왼쪽부터) 배우 김보라와 올해 '벡델리안'에 선정된 '벌새' 김보라 감독, 1부 심포지엄에 참석한 '우리집' 윤가은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지난 4일엔 한국영화 스크린 안팎 성평등을 되짚는 ‘벡델데이 2020’ 행사가 온라인 중계로 진행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 한국영화감독조합이 주관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중 양성평등 가늠 지수 ‘벡델테스트’에 충실한 작품  ‘벡델초이스 10’을 발표하고, 관련 심포지엄・좌담회를 열었다.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과 제작자 김지혜 아토ATO 공동대표, ‘벌새’의 김보라 감독, ‘미성년’을 제작한 이동하 대표 등이 참석했다. 주최측은 “(정부 주최) 양성평등주간의 첫 영화 관련 행사”라고 밝혔다.

35년 전 미국 양성평등 지수, 한국서 재조명 

올해 '벡델데이 2020' 일환으로 한국영화 10편을 선정한 '벡델초이스 10' 기준이 된 평가 잣대다. 1~3번 문항이 '벡델 테스트'고 4번부터는 '벡델데이' 주최측이 의견을 모아 새롭게 고안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올해 '벡델데이 2020' 일환으로 한국영화 10편을 선정한 '벡델초이스 10' 기준이 된 평가 잣대다. 1~3번 문항이 '벡델 테스트'고 4번부터는 '벡델데이' 주최측이 의견을 모아 새롭게 고안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에서 (①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나와서 (②)남자 얘기가 아닌 (③)대화를 할 것. 이 뻔하고 간단한 조건조차 통과 못 할 영화가 있겠어? 근데 정말 통과한 영화가 거의 없는 순간 이게 중요한 이야기가 되죠.”

이날 사회를 맡은 변영주 감독의 말이다. 벡델테스트는 영화 속에 여성이 얼마나 빈번하게, 주도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지 이 세 가지(①②③) 잣대로 판단하는 테스트다. 미국의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1985년 고안한 이래 업계에선 뜨거운 화두가 돼왔지만, 대중에겐 지금껏 낯설었던 개념이다.

올해 ‘벡델초이스 10’엔 ‘82년생 김지영’ ‘메기’ ‘미성년’ ‘벌새’ ‘아워 바디’ ‘야구소녀’ ‘우리집’ ‘윤희에게’ ‘찬실이는 복도 많지’ ‘프랑스 여자’ 등 10편이 선정됐다.

높아진 성인지 감수성…표현 하나도 고심 

‘여성’에 대한 영화계의 관심이 커진 만큼 논란거리도 늘었다. 여성 관련 행사 초청 연사가 이후 윤리적 문제로 비판받거나 행사 장소로 선정된 곳이 ‘미투’ 논란 인물과 연관돼있다는 반발로 최종 행사지에서 탈락하는 사례도 생겼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우리집’ 등 여성 영화를 홍보한 최유리(아워스) 대표는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진 만큼 단어 하나도 고르게 된다. ‘여성스러운’ ‘아름다운’처럼 성별이나 외모를 특정하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임순례 "산업 자본적 환경 깊이 고민해야"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한국 상업영화(제작비 10억 이상, 상영관 100개 이상)에 참여한 제작·프로듀서연출·주연·각본 등 13개 직군에 대한 성비 분석. 지난 4일 온라인 중계된 '벡델데이 2020' 행사에서 영화평론가 조혜영 박사가 공개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한국 상업영화(제작비 10억 이상, 상영관 100개 이상)에 참여한 제작·프로듀서연출·주연·각본 등 13개 직군에 대한 성비 분석. 지난 4일 온라인 중계된 '벡델데이 2020' 행사에서 영화평론가 조혜영 박사가 공개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여전히 통계적으론 남성이 절대 다수인 영화계의 다양성과 균형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4일 ‘벡델데이’ 행사에서 영화평론가 조혜영 영상예술학 박사는 “2009~2018년 10년간 한국영화 중 절반 가량만 벡델테스트를 통과했다. 총제작비 10억 이상, 최대 스크린 수 100개 이상 상업영화 범주로 좁히면 그마저도 못 미쳤다”고 밝혔다. 또 “2009년 15.2%에서 2018년 12.8%로 여성 감독 성비는 오히려 낮아졌다. (‘기생충’의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엑시트’의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 등) 여성 제작자들의 두드러진 활약 속에서도 전체 제작자 중 여성 비율은 20% 초반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순례 감독은 지난달 여성영화인모임이 발간한 인터뷰집 『영화하는 여자들』(사계절)에서 “영화산업에 진입하려는 세대의 젠더 감수성은 이만큼 높아져 있는데 영화계는 아무래도 남성 중심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면서 “여성 영화의 서사와 장르가 투자와 배급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산업 자본적 환경에 대해 깊이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이라고 짚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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