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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면 건물폐쇄·업무중단…대역죄인 된다, 코로나 1호 공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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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재택근무 증가로 평일에도 한산한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유스페이스 광장 모습. 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재택근무 증가로 평일에도 한산한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유스페이스 광장 모습. 연합뉴스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불과 한달여 전까지만 해도 10명대로 떨어지며 끝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희망도 잠시, 감염증은 다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엔 ‘비대면’, ‘저녁이 있는 삶’, ‘워라밸(일과 개인 생활의 균형)’ 등 달라진 사회·조직문화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7개월째 이어지는 일상의 제약 속에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한계를 알리는 신호가 감지된다. 코로나19로 인한 우울감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블랙’, ‘코로나 분노’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기업딥톡]33. 불신·불안·무기력에 시달리는 직장인

◇ ‘1호가 될 순 없어’  

감염증이 인구가 밀집한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퍼지자 조직마다 ‘1호 공포증’이 커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대기업이나 40대 이상의 직장인들 사이에서 압박감이 크다. 직원 수 8000명의 제조 대기업에 다니는 김 모(48) 부장은 “회사 반경에 깜깜이 감염이 많아 확률상 (확진자가) 나올 때가 됐다. 걸릴 때 걸리더라도 회사 1호가 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회사나 개인 변호사·병원 다니는 친구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지만 큰 회사 직원은 한명 걸리면 건물이 폐쇄되고 업무가 중단되고 '대역죄인'이 된다”며 “신상 털리고 감염경로에 ○○치킨이라도 뜰 걸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했다.

국내 5대 그룹 통신 계열사에서 법인영업을 하는 이모(45)씨는 거래처 방문을 일절 하지 않고 전화로 불만 사항 등만 간간이 처리하고 있다. 그는 “이 나이 먹어 코로나 걸리면 회사에서 어떤 낙인이 찍혀 불이익을 받을지 뻔히 아는데 무조건 조심하는 게 답”이라며 “술자리는 물론 지인의 장례식도 가지 않는다”고 전했다.

◇ 늘어나는 불신과 스트레스

코로나19 확산세가 계속되면서 포장·배달로 점심을 해결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시내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포장한 점심 도시락을 들고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뉴스1

코로나19 확산세가 계속되면서 포장·배달로 점심을 해결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시내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포장한 점심 도시락을 들고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뉴스1

감염증 공포는 주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유통기업 A 과장은 “심지어 회사가 운영하는 쇼핑 매장도 가기가 꺼려진다. 방역에 신경 쓴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많은 사람이 여기저기 만지고 다니는 데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아이 어린이집 친구 부모들과 퇴근 후에 한잔씩 하곤 했지만 이제 (감염이 될까 봐) 서로를 믿을 수가 없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직장도 ‘불신의 시대’다. 익명 게시판마다 ‘회사에 무증상자가 있을지 모르는데 왜 재택근무 안 하느냐’는 내용의 글들이 수두룩하다. 실제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B씨는 이달 초 코로나19 진단 검사에서 음성을 받았지만 결국 일주일 휴가를 냈다. B씨는 “음성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동료들이 내가 나오는 걸 부담스러워 하더라. 이해는 되지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라며 씁쓸해했다.

개인이 느끼는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다.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턱에 걸친) '턱스크'가 보이면 옆 칸으로 이동하고, 누군가 기침만 해도 불안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정보기술(IT) 업체의 윤 모(33) 과장은 “이 모든 게 교회 집단 때문이란 생각마저 들어 억울하다”며 “지인이 주말에 SNS에 ‘사람 없길래 살짝 다녀왔음’이라며 올린 여행 사진만 봐도 ‘너 같은 인간 때문에 코로나가 안 끝난다’는 생각에 짜증이 솟구친다”고 털어놨다.

◇ “2020년은 망했어…” 

재택근무가 늘면서 사무용 칸막이를 사용해 집을 사무실처럼 꾸며놓은 모습. 사진 11번가

재택근무가 늘면서 사무용 칸막이를 사용해 집을 사무실처럼 꾸며놓은 모습. 사진 11번가

재택근무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불만도 적지 않다. 국내 10대 그룹 지주사에 근무하는 이 모 부장은 “프로젝트 하나를 하더라도 모여서 하는 게 훨씬 진척 속도가 빠르다”며 “재택만으론 생산성에 한계가 있다. 올해는 잘해봐야 현상유지”라고 내다봤다. 메신저로 회의를 하다 보니 팀원들끼리 문자 뉘앙스 등에 오해가 생겨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자녀가 어린 직장인의 경우 어린이집·유치원·학교는 물론 카페까지 문을 닫으면서 재택근무 여건은 더욱 나빠졌다.

이제 고용 불안은 특정 업종만의 일이 아니다. 워라밸을 두고 “워(Work)가 없어지고 라(Life)만 남을 판”이라는 자조가 나온다. 한 대기업 임원은 “재택근무를 해보니 이 정도 적은 인력으로도 회사가 돌아간다는 데 놀랐다”며 “회사에서 ‘필수인력’만 빼고 재택 시키라고 하는데 ‘나머지는 아웃소싱할 수 있다’는 말 아니겠냐. 앞으로 구조조정이 몰아닥칠 것”이라고 걱정했다.

◇ 낙관 대신 냉정한 ‘현실주의자’ 돼야

정신과 전문의 20년 경력의 이경민 대표는 “지금은 가장 긍정적인 전망만 기대할 게 아니라 이 상태로 2~3년 갈 수 있다는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리더십 코칭과 조직문화 진단을 전문으로 하는 마인드루트 리더십랩 대표로 활동 중이다.

이 대표는 “부정적인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라는 것”이라며 “나에게 닥친 어려움(코로나19)에 집중하기보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때 고난은 더 작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을 추천한다”며 “제한된 환경과 자원 속에서 자기 계발에 투자하고, 주어진 회사 일을 더 열심히 한 사람이 결국 백신이 나오고 코로나가 잦아들었을 때 기회를 잡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조직은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조직이 없이 내가 어떻게 생존할지, 좀 더 독립적으로 나의 생계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진단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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