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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순 금지법’ 지켜만 볼텐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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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가영
이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가영 사회1팀장

이가영 사회1팀장

“국무총리도 집회 허가 재판장을 대놓고 비난하고 법무장관도 가세하는데 대법원장은 묵언수행 중이네요.”

일주일쯤 전 한 판사가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광복절 광화문 집회’ 이후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가팔라지자 여권을 중심으로 서울행정법원 박형순 판사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질 때였다. 여당에선 이른바 ‘박형순 금지법’을 발의했고, 청와대 게시판엔 박 판사 해임 요구 국민청원이 등장했다. 여기에 정세균 총리까지 합류하자 판사들은 부글부글했다.

하지만 사법부의 독립을 위협하는 언사가 횡행하는데도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는 당황스러울 만치 침묵했다. 참다못한 현직 부장판사가 나섰다. 지난달 31일 김태규 부산지법 부장판사는 “이런 무리한 입법은 ‘판사 겁주기’ 시도다. 정부가 국민 탓을 하고 새로운 희생양만을 찾는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굳이 판사 편을 들 필요가 없는 대한변협도 성명서를 냈다. 변협은 집회 허가가 신중했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면서도 “법관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은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노트북을 열며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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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지난 1일에서야 처음 입을 연다. 국회 예결위 답변을 통해서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재판부가 충돌하는 가치 속에서 상당히 진지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으로 본다”고 말했다. “집회가 코로나 확산의 계기가 됐다는 지적에 법원도 상황을 무겁게 인식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듣기에 따라선 집회 허가에 잘못이 있다는 뉘앙스가 풍긴다.

전광훈 목사가 주도한 광화문 집회는 위험성이 예고됐음에도 강행해 결과적으로 코로나 19 확산의 원인을 제공한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도덕적 비난뿐 아니라 법률적 책임도 감수해야 한다. 중요한 건 법률적 책임을 묻는 것도 결국 법관의 판단에 따른다는 거다. 현대 민주사회의 구성원들이 갈등 조정의 최종심급인 사법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대법원장의 침묵은 아쉽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평소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재판을 하자”고 했다. 그의 진정성을 인정하더라도 자칫 포퓰리즘이나 여론 눈치보기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국민의 눈높이’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사법부는 국민의 눈높이만 염두에 두는 정치권이 아니다. 그 수장인 대법원장은 적어도 판사들이 위협을 받아 양심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리지 않도록 최소한의 보호를 해줘야 한다. 흉악범도 아닌 대한민국 판사가 정치적 희생양이 돼 법률의 별칭으로 등장하는 사회를 막는 것이 그가 할 일이다.

이가영 사회1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