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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도 몰랐던 퇴진…아베는 몰락한 영웅 '나폴레옹' 열독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이 열린 날 오후까지 최측근들도 몰랐을 정도로 극비리에 결정된 사안인 만큼 그 배경을 둘러싸고 다양한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아베 총리가 이 시점에 사임을 발표한 것은 13년 전 아베 1차 내각 당시의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혼자 고민하고 결정" 최측근도 몰랐던 사임 #궤양성 대장염 악화로 몸무게 10킬로 빠져 #국무회의 집중 못해..."총리 이상" 걱정 확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8일 오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사의를 공식 표명했다. [연합뉴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8일 오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사의를 공식 표명했다. [연합뉴스]

아베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데 따르면 몸의 이상을 눈치챈 것은 6월이다. 6월 13일 받은 정례 건강검진에서 주치의로부터 '궤양성 대장염 재발 징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후 실제 몸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리고 8월 17일 7시간 반에 걸친 긴 검사를 받았고 일주일 후인 24일 재발 판정을 받았다.

30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24일 병원 방문 당시 아베 총리의 몸무게는 이전에 비해 10kg가량 빠진 상태였다고 한다.

"설명해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궤양성 대장염은 스트레스 등으로 악화하는 질병이다. 6~7월 아베 총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상황에서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져있었다.

늘지 않는 PCR(유전자증폭) 검사 능력, 코만 가리는 '아베노마스크' 배포, 여행 장려를 촉진하기 위한 '고 투(Go To) 캠페인' 등 내놓는 정책마다 비난을 받았다. 내각 지지율은 2012년 12월 2차 내각 출범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29일 일본에서 발행된 주요 일간지는 1면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사퇴를 집중 보도했다. [연합뉴스]

29일 일본에서 발행된 주요 일간지는 1면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사퇴를 집중 보도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총리의 이상을 감지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닛케이에 따르면 일부 의원들은 총리가 6월 중순부터 모든 브리핑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에게 맡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데 대해 '업무 결정에서 총리가 배제된 게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7월 중 총리관저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한 이들에 따르면 아베 총리의 지시는 급격히 줄어들고 얼굴색은 점점 검게 변해갔다고 한다. 관료들 사이에서 "설명을 해도 (총리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며 총리의 집중력 저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아베 총리는 비밀리에 병원이 아닌 곳에서 진료를 받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교도통신은 병원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아베 총리가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사택이나 도쿄 롯폰기 피트니스클럽 등에서 의료진을 만났다고 전했다. 이달 10일에도 아베 총리는 롯폰기 피트니스클럽에 3시간 30분 동안 머물렀다.

최측근도 눈치 못 챈 총리의 결심 

28일 회견에서 아베 총리는 "24일에 병원을 나온 후 사임 쪽으로 마음을 굳혔지만, 혼자 고민하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24일 오전 게이오 대학병원으로 향하는 차에 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연합뉴스]

24일 오전 게이오 대학병원으로 향하는 차에 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연합뉴스]

실제로 발표 당일 오후까지 총리의 사임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사히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이 29일 전한 내용에 따르면 발표 전날인 27일 저녁 아소 다로(麻生太郎) 부총리 및 아소 파벌 의원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도 사임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총리는 27일 저녁 이후 아무와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28일 오전 총리관저에서 각의(국무회의)를 마치고 아소 부총리와 약 35분간 독대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사임을 입 밖에 낸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가 돌연 "병이 악화돼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자 깜짝 놀란 아소 부총리는 "통원하면서 직무를 계속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총리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집권 자민당의 2인자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도 전혀 몰랐다. 니카이 간사장은 기자회견 당일 오후에도 한 TV 프로그램 녹화장에서 "(총리의) 퇴진은 절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베 레거시' 완수 불가능에 좌절

총리 본인의 언급대로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망설였지만" 사임으로 기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임기 내 '아베 레거시(정치적 유산)' 완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꿈꾸던 헌법 개정 논의도, 러시아·북한과의 교섭도, '회심의 카드'였던 도쿄올림픽 개최도 모두 코로나에 발목이 잡힌 상태였다.

2007년 9월 12일 긴급 기자회견에서 사임을 발표한 직후 기자회견장을 떠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중앙포토]

2007년 9월 12일 긴급 기자회견에서 사임을 발표한 직후 기자회견장을 떠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중앙포토]

특히 13년 전의 '트라우마'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닛케이는 분석했다. 2007년 9월 총리직에서 내려올 때, 아베 총리는 이번처럼 사전에 아무 신호 없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심지어 이틀 전 국회에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총리직을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고 연설한 직후였다.

더구나 총리가 사임 발표 후 바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한동안 일본 정치는 '올스톱' 상태였다. "책임감 없이 국정을 내던졌다"는 비난이 두고두고 따라다녔다. 따라서 이번엔 병이 더 악화하기 전 사임의 뜻을 밝힌 후, 차기 총리가 결정될 때까지 차분히 정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읽으며 몰락하는 영웅에 공감?

닛케이에 따르면 아베 총리가 최근 읽고 있던 책은 일본 작가 사토 겐이치(佐藤賢一)의 소설 『나폴레옹』이었다고 한다. 전 3권 중 2권까지만 읽었다면서 "3권은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폴레옹이 몰락해가는 이야기일 뿐이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몰락하는 영웅의 심정이란 (아베 총리) 스스로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느꼈을지 모른다"고 닛케이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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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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