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포커스

한국엔 전임 대통령 성공 사례 배우는 전통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문재인 정부는 집권 4년 차에 전례 없이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그러나 외교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 정부는 난항 중이다. 한·미 동맹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 위기의 상당 부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치졸하고 상업적인 접근 방식 때문이지만, 청와대 역시 미국의 외교 전략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여 문제를 키운 것도 사실이다.

망언파동에도 방일 강행한 DJ #이명박은 오바마 새 관점 유도해

한·일 관계도 최악의 상태다. 중국과의 관계 진전도 거의 없다. 러시아는 한·미 동맹을 약화할 틈만 엿본다. 동남아시아와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지만,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향력이 큰 국가들과의 관계다.

이런 곤경이 한국 정부의 잘못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상대가 오바마·후진타오·메드베데프·오부치였다면 오늘날 한국 외교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당면 문제를 극복할 책임은 청와대에 있다. 문 대통령의 전임자들 역시 재임 기간 난관이 있었지만 헤쳐나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변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한국의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이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전략적인 통찰과 단호한 결단력 덕분이었다. 1998년 일본 농림부 장관이 술김에 “한국은 일본 식민통치에 감사해야 한다” 고 말해 한·일 관계에 위기를 가져왔으나, 김 전 대통령은 이 망언을 무시하고 예정대로 도쿄 방문을 강행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함께 열어갈 비전을 제시했고, 이에 오부치 총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일본과의 협력을 약속하면서 이미 일본 측에서 거절한 요구조건을 수락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이것은 외교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종종 미국을 비판했지만 한·미 동맹의 실질적인 진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여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을 추진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결단력 있는 외교가 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청와대의 신뢰를 높인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 외교에서 두 가지 큰일을 했다. 하나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한·미 관계의 대변인이 되도록 한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출범 당시 아시아를 일본 대 중국의 대립 구도로 이해하고 폭넓은 지정학적 전략을 구상했다. 한국은 전략적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9년 이 전 대통령은 오바마와의 첫 만남 때 무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현안에서 미국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역할을 주문했다. 당시 깊은 인상을 받은 오바마는 “한·미 동맹이 아시아 안보의 핵심(linchpin)”이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의 정치 분석가들은 조 바이든 후보가 차기 대선에서 당선될 확률이 크다고 본다. 바이든 후보는 미국과 동맹국들의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일이 실제로 진행될 경우 문 대통령은 이 전 대통령의 외교를 참고해야 한다.

이 전 대통령은 G20, 세계개발 원조총회, 핵안보정상회의 등 주요 회의들을 주재하며 ‘글로벌 코리아’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한국 대통령과 친분을 쌓은 오바마 전 대통령은 한국이 굵직한 회의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전 대통령은 세계에 한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명박 정부 때 한국은 국제사회의 신진 리더로 부상했다.

현대 정치의 부정적 특징 중 하나는 국가 지도자가 그들의 전임자를 헐뜯거나 무시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마치 자신이 과거의 실패와 상관이 없는, 새로운 구원자인 양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현직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들의 성공 사례에서 배우는 전통이 한국에는 없다. 안타깝다.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외부 필진 기고의 논지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