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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방한 약속 놀런 감독 “20년 전 ‘메멘토’ 장면이 ‘테넷’ 출발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새 영화 '테넷' 촬영 현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왼쪽)과 주연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새 영화 '테넷' 촬영 현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왼쪽)과 주연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인터스텔라’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호응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무척 개인적이고 내 심장에 가까운 영화여서 다른 전작들의 성공보다 훨씬 더 기뻤죠. 이번 영화 ‘테넷’도 한국 관객이 세계 최초로 보는 이들에 포함됐다는 게 기뻐요.”

26일 개봉하는 첩보액션 영화 ‘테넷’으로 돌아온 영국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50)의 말이다. 앞서 코로나19 속 미국에서 영화 막바지 작업 중이던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26일 개봉 SF 첩보액션 '테넷' #크리스토퍼 놀런 단독 인터뷰 #20년 전 '메멘토' 속 장면 토대 #시공 초월 능력, 축복일까 저주일까 #"'기생충', 왜 영화 사랑하는지 상기시켜 #'인터스텔라' 사랑해준 한국 꼭 가겠다"

기존 시리즈를 새단장한 ‘배트맨’ 3부작부터 시공 초월 액션을 선보인 ‘인셉션’, 전쟁 영화 ‘덩케르크’ 등 한국 관객의 ‘놀런 사랑’은 각별했다. 우주 탐사를 그린 SF ‘인터스텔라’는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모으며 북미‧중국 다음가는 흥행을 거뒀다.

어렵다 vs 다시 보고 싶다  

각본‧제작을 겸한 그가 “지금껏 가장 야심찬 영화”라 말한 ‘테넷’은 일찌감치 관심이 뜨거웠다. 지난 21‧22일 사전 유료 시사회부터 전국 593개관에서 이틀만에 8만4000명이 관람했다.

주로 “어렵다”는 반응이지만 “다시 보고 싶다”며 해석에 의지를 불태우는 열성 관객도 적지 않다. 세상을 파괴하려는 악당 사토르(케네스 브래너)가 미래에서 보낸 공격에 맞서, 작전의 주도자인 주인공(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과거‧현재‧미래를 오가며 첩보를 펼치는 다소 복잡한 이야기여서다. 멸망을 막을 유일한 단서 ‘테넷’(tenet, 주의‧교리)의 정체가 아리송할뿐더러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인 ‘인버전’의 개념도 생소하다. 기존 시간여행 작품들처럼 짠, 마법처럼 시공을 오가는 게 아니라 물리학 이론을 활용, 사물의 엔트로피를 거꾸로 반전시켜 시간을 거스른단 설명이다. 노벨물리학상 수상 학자 킵 손이 ‘인터스텔라’에 이어 대본 검토에 참여했다.

20년 전 '메멘토' 속 그 장면이 출발점

'테넷' 촬영 현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오른쪽)이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에게 연기 디렉션을 하고 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테넷' 촬영 현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오른쪽)이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에게 연기 디렉션을 하고 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온 무기는 작동 방식도 정반대다. 총을 쏘는 게 아니라 이미 발사된 총알이 방아쇠를 당기면 총구로 빨려들며 타깃을 관통하는 신개념 총격 액션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인버전’된 총알 역행 장면은 놀런 감독의 출세작인 ‘메멘토’에도 비슷하게 나온 적이 있다. 단기기억손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살인 현장을 되짚는 첫 장면에서다. ‘테넷’의 아이디어가 태동한 게 바로 ‘메멘토’가 나온 20년 전이었다.

20년 전 어떤 아이디어가 처음 떠올랐나.  

“몇 가지 생각난 이미지 중 가장 중요한 열쇠가 벽에 박혀있던 총알이 빠져나와 총구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메멘토’에선 캐릭터의 시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은유였지만 6~7년 전쯤 그로부터 발전한 거대한 첩보물 시나리오를 시도하게 됐고 여기에 SF가 결합하게 됐다.”

작전을 주도하는 첩보요원 주인공이 유리에 박힌 총알을 바라보고 있다.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온 무기들은 현재의 무기들과는 정반대 방식으로 작동한다. [AP=연합뉴스]

작전을 주도하는 첩보요원 주인공이 유리에 박힌 총알을 바라보고 있다.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온 무기들은 현재의 무기들과는 정반대 방식으로 작동한다. [AP=연합뉴스]

기존의 시간여행이 아닌 ‘인버전’이란 개념에 매료된 이유는.  

“시간여행 영화의 세계에 새로움, 신선함을 불어넣고 싶었다. 시간을 조작하되, 매우 구체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며, 매우 많은 제한 속에서 해내고 싶었다. 그래야 관객들이 시간의 방향이 변화하는 이야기에 동승할 수 있을 테니까. 비록 그 결과물이 복잡할지라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시간여행 영화는 일반적으로 추상적인 경향이 있지만, ‘테넷’의 법칙은 단순하다.”

파란 미래, 붉은 과거…색깔도 이유 있어 

영화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장치는 두 개의 출입구가 있는 회전문 형태로 표현된다.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방향은 푸른색, 현재에서 미래로 멀어지는 방향은 붉은색 빛이 감돈다. 이는 놀런 감독이 기존 우주의 빛 개념을 적용한 것. 우주에서 별이 우리를 향해 다가올 때 빛의 파장이 더 짧은 푸른색 스펙트럼으로, 반대로 멀어질 땐 파장이 길어지면서 붉은색 스펙트럼으로 치우쳐 관측되는 걸 각각 청색편이와 적색편이라 한다.

'테넷'에서 주인공이 또 다른 작전요원 닐(로버트 패틴슨, 오른쪽)이 '인버전'이 가능한 회전문이 있는 공간에 서있다.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이 비치는 두 공간이 양쪽을 볼 수 있는 유리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테넷'에서 주인공이 또 다른 작전요원 닐(로버트 패틴슨, 오른쪽)이 '인버전'이 가능한 회전문이 있는 공간에 서있다. 각각 푸른색과 붉은색이 비치는 두 공간이 양쪽을 볼 수 있는 유리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놀런 감독은 또 “회전문은 어떻게 시각화된 이미지를 통해 3차원을 (시간이 더해진) 4차원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라며 “캐릭터들이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고, 나오는 움직임이 대비될 수 있도록 (미래와 현재를 오가는 양방향이) 창문을 통해 서로 보이게 처리했다. 일종의 산업적 기계장치, 메커니즘처럼 보이길 바랐다”고 했다.

전작 ‘인셉션’이 무의식을 조작해 시공간을 초월한단 점에서 이번 ‘테넷’을 그 속편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애초의 연관성은 없지만, 문학적인, 영적인 속편이라고 할 순 있겠다. 하지만 ‘테넷’은 스파이 영화고 ‘인셉션’은 하이스트 영화(범죄자들이 모여 무언가를 훔치는 장르)다. 둘 다 SF 요소를 차용한 액션으로 각 장르를 더 신선하고 신나게 재평가하고, 재접근하도록 만든다는 점은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주연을 맡은 존 데이비드 워싱턴(왼쪽)은 배우 덴젤 워싱턴의 아들로, 놀런 감독이 영화 '블랙클랜스맨'을 보고 발탁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주연을 맡은 존 데이비드 워싱턴(왼쪽)은 배우 덴젤 워싱턴의 아들로, 놀런 감독이 영화 '블랙클랜스맨'을 보고 발탁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왜 ‘테넷’에선 첩보 장르를 택했나.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가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였다. 그 규모와 화려함, 흥분을 매우 명확하게 경험한 게 기억난다. ‘테넷’은 그런 느낌을 오늘날 대형 스크린에서 보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나의 시도다. 스파이물 세계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전하려면 약간의 신선함을 끼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관객도 신선한 눈으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보잉 747 실제 폭발…CG 역대 최소화

'테넷'에서 거대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 보잉 747 비행기 등 실물 크기 소품과 세트를 동원해 이런 장면들을 CG를 최소화하고 직접 촬영해냈단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테넷'에서 거대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 보잉 747 비행기 등 실물 크기 소품과 세트를 동원해 이런 장면들을 CG를 최소화하고 직접 촬영해냈단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한번도 본 적 없는 초대형 액션도 많다. 미래에서 현재로 거슬러온 ‘인버전’ 자동차들의 역주행과 정주행 자동차들의 추격전이 뒤엉킨다. 역사상 최대 규모 야외 세트장도 지었다고 한다. 실물을 동원한 보잉 747 비행기와 격납고 폭발 장면도 압권이다. 프로듀서 엠마 토마스가 “‘테넷’은 10년 전이라면 만들 수 없었을 영화”라고 말했을 정도다.더 놀라운 건 컴퓨터그래픽(CG)을 활용한 특수효과 장면을 역대 놀런 감독 영화 중 가장 적은 300개 미만으로 최소화하고 대부분을 실제 ‘촬영’해냈다는 점이다. “관객도 그려넣은 것과 실제 촬영한 것의 차이를 알 것”이라면서다. 통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특수효과 장면이 수천 개임을 감안하면 놀랍다.

놀런 감독은 “아주 오래 전 ‘인셉션’을 비롯한 다른 전작들에서 했던 것들을 토대로 새롭게 만들었다”면서 “내게 영화 프로젝트란 매번 이전에 관객한테 줬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 게임의 장애물을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자동차 추격전 촬영을 위해 거대한 카메라를 자동차에 직접 설치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자동차 추격전 촬영을 위해 거대한 카메라를 자동차에 직접 설치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번 영화의 가장 도전적이었던 지점은.  

“어마어마한 액션 시퀀스를 찍는 것. 대형 비행기가 부서지고 긴 자동차 추격전을 펼치고 장시간의 전투가 벌어져야 했다. 모든 도전을 내 팀들, 배우, 스턴트, 촬영감독 등과 함께했다. 그들 모두를 ‘다음 단계’로 데려가 관객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액션 시퀀스를 만들어내길 원했다.”

인셉션·블랙홀·인버전 체험 고른다면…

영화마다 시공을 초월하는 설정을 실험해온 놀런 감독이다. ‘인셉션’에서 무의식을 조작하는 능력, ‘인터스텔라’에서 전체 인생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블랙홀, ‘테넷’의 시간을 역행하는 인버전 중 단 한 가지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느냐 물었더니 “솔직히 아무것도 고르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그 이야기들을 다루며 관심을 가졌던 지점이기도 하다. 그 특별한 능력들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또 저주일 수도 있다”면서다. 그는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매튜 매커너히)는 그 자신이 없이 흘러가는 자녀들의 삶을 보며 저주받고 소외된 것처럼 느낀다.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의 재력은 힘인 동시에 저주다. ‘테넷’도 예외는 아니다”라며 “주인공은 우리를 일종의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멀리 나아가게 하고 적에 맞설 힘을 얻게 되지만 그 가능성엔 달갑지 않은 위험도 느껴진다. 인버전 상태에선 산소가 폐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설정을 가미한 것도 그런 불안감과 어려움을 느끼길 바라서”라고 했다.

최근작 가족애 강조…"나는 패밀리맨"

'테넷' 현장에서 주연배우와 촬영을 상의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왼쪽). 그는 촬영 현장에서도 정장 차림을 고수하기로 유명하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테넷' 현장에서 주연배우와 촬영을 상의하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왼쪽). 그는 촬영 현장에서도 정장 차림을 고수하기로 유명하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초기작과 달리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등 최근작에선 가족 간 사랑과 휴머니즘을 통한 희망을 강조하는 경향이 보인다.  

“영화감독으로서 색다른 것을 시도하고 본능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려고 노력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인생 경험을 함에 따라 실제 나를 감동하게 하는 것에 열려있게 된다. 나는 확실히 네 아이를 둔 ‘패밀리맨’이고 얼마 전엔 맏이가 대학에 입학해 작별인사를 하고 집을 떠난 게 무척 마음을 움직였다. 더 오래 영화를 찍을수록 캐릭터들에 대한 감정적인 연결고리가 영화를 만드는 데 더 많은 동기부여가 된다. 영화의 기술, 메커니즘보다 더 말이다.”

‘테넷’은 코로나19 속에 처음 극장가에 나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이기도 하다. 북미 개봉은 9월3일. 영화관들이 팬데믹 사태로 쓰러지는 걸 두고 봐선 안 된다는 놀런 감독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올해 초 ‘워싱턴포스트’에 이 같은 취지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속 개봉에 대해 그는 “이런 식으로 영화를 개봉하게 될줄은 상상 못 했지만 세상이 변했고 우리는 모두 적응해야만 한다”면서 “워너브러더스가 이 영화의 출시를 허락한 게 기쁘다. 천천히 개봉한 영화들이 점차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과정이 마침내 시작됐다는 게 기쁘고 희망적으로 보고 있지만, 그것이 매우 느린 과정이 될 거라곤 생각한다”고 했다.

'기생충', 영화 왜 사랑하는지 상기시켜줬죠  

그는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봤다며 “몇 년간 정말 흥미진진한 영화들을 못 보고 있다가 정말 흥분하며 봤다. 그 영화는 내가 왜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지를 상기시켜줬고 영화와 나를 재결합시켜줬다. 무척 신나는 경험이었다”고 했다. 또 코로나19 탓에 올해는 불발됐지만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한국에 가능한 빨리 가고 싶다”면서 내한 가능성을 크게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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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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