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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모인 할아버지 이층집 "관객 각자 가족의 기억 스미길 바랐죠"

중앙일보

입력

윤단비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에서 할아버지집에 모인 가족의 행복한 한때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윤단비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에서 할아버지집에 모인 가족의 행복한 한때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엄마도 제가 본가 다녀가면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크다고 하시거든요. 가족이란 게 그래요. 각자 삶을 살고 떠나가기도 하지만 함께한 시간으로 인해 (가족은) 계속 존재하죠. ‘착한 가족영화’보단 외롭거나 누군가 빈자리가 느껴질 때 이 영화가 친구가 돼주길 바라며 만들었습니다.”

각본·공동제작을 겸한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20일 개봉)으로 14일 만난 윤단비(30) 감독의 말이다. 영화는 더는 같이 살지 않는 엄마 대신 아빠(양흥주)‧고모(박현영)와 함께 할아버지(김상동)댁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고교생 옥주(최정운)와 초등생 동주(박승준) 남매의 나날을 그렸다. 매미 소리 가득한 오래된 이층집, 텃밭 채소로 비빔국수 해 먹고 수박을 베어 무는 정겨운 일상 속에 가족과의 이별, 그리움이 시린 그늘처럼 은근하게 일렁인다.

20일 개봉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 #장편 데뷔작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4관왕 #할아버지댁서 여름방학 보낸 남매 성장담 #"관객 각자 가족의 기억 스며들길 바랐죠"

'우리들' '벌새' 잇는 사려 깊은 성장영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의 각본, 공동 제작을 겸한 윤단비 감독이 촬영 현장이었던 인천의 양옥집 이층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남매의 여름밤'의 각본, 공동 제작을 겸한 윤단비 감독이 촬영 현장이었던 인천의 양옥집 이층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 김보라 감독의 ‘벌새’ 등 최근 아이들의 내밀한 성장을 그려 주목받은 여성 감독들의 데뷔작과 궤를 잇는다.

영화가 처음 선보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시민평론가상·넷팩상·KTH상 등 4관왕을 차지한 데 더해 올해 1월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선 “관계와 감정의 사려 깊은 초상화”라 호평받으며 ‘밝은미래상’을 받았다. 뉴욕아시아영화제·산세바스티안영화제 등 해외 초청 소식도 잇따른다.

처음 시나리오는 가족이 할아버지 유산을 탐내는 “작은 ‘기생충’ 같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웠지만, 스태프들의 피드백으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인가, 고민 끝에 다시 써내려간 결과물이 지금의 영화라는 설명이다. 첫 영화로 가족 이야기를 한 이유론 “이 이야기를 해야만 다음 분기점으로 넘어갈 수 있어서”라고 했다. “학생 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의 흠결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말을 삼가고 좋은 이야기만 했는데 지나고 보니 모든 가족에게 그런 흠결과 상처가 있고 각각의 방식으로 그것을 치유해나간다는 것을 알았다”면서다.

포도나무 넝쿨진 오래된 이층집의 추억

영화 '남매의 여름밤'에서 (왼쪽부터) 동주와 옥주 남매가 국수를 나눠먹는 장면이다. 오래된 재봉틀과 책장 등은 촬영이 진행된 이층집에 실제 살고 있던 노부부의 세간을 영화에 그대로 활용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남매의 여름밤'에서 (왼쪽부터) 동주와 옥주 남매가 국수를 나눠먹는 장면이다. 오래된 재봉틀과 책장 등은 촬영이 진행된 이층집에 실제 살고 있던 노부부의 세간을 영화에 그대로 활용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살면서 느닷없는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거든요. 그에 대한 애도, 가족을 통해서 위안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영화에 담았죠. 실제 제 경험이 들어간 건 10~20%지만 감정이나 정서는 100%예요. 옥주처럼 고1 땐 어른들 입장도 이해되고 연민도 가지만 사춘기를 겪으면서 제가 잘 규정지을 수 없었던 감정들이 힘들기도 했어요. 옥주의 시선으로 가족을 바라볼 때 그 진폭이 크게 담기지 않을까, 생각했죠.”

평생 주택에서 살았다는 그에겐 ‘집’은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노부부가 실제 아이들을 출가시키고 살고 있는 이층 양옥집을 헌팅 2달여 만에 인천에서 발견해 주인을 수차례 설득한 끝에 섭외했다. “대문 위 포도나무, 다용도실 담금주, 재봉틀 등 상상으론 구현할 수 없었을 오브제가 도처에 있었다. 실제 세월이 켜켜이 녹아든 집의 개성과 생활감이 영화에 많은 상상력을 넣어줬다”고 윤 감독은 말했다. “‘남매의 여름밤’ 각본집 서문에 최원준 건축가가 ‘아파트가 많아진 요새 이 영화를 보며 (집에 관한) 기록 영화가 될 수도 있겠다’고 한 걸 보고 정말 사라지면 어쩌지, 안타까웠다”고도 했다.

관객이 집에 함께 있는 듯 느끼길 바랐죠

영화 '남매의 여름밤' 촬영 현장 모습.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남매의 여름밤' 촬영 현장 모습.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인천에서 이 이층집을 발견하면서 영화 속 설정도 집에 맞춰 바뀌었다. 할아버지 영묵이 혼자 사는 집의 텃밭은 시나리오에선 황폐한 상태로 묘사되지만 실제 촬영이 진행된 집의 주인 부부가 푸르게 가꾼 텃밭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원래 설정을 정반대로 바꿨다. 윤단비 감독은 영화가 덕분에 더 풍성해졌다고 귀띔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인천에서 이 이층집을 발견하면서 영화 속 설정도 집에 맞춰 바뀌었다. 할아버지 영묵이 혼자 사는 집의 텃밭은 시나리오에선 황폐한 상태로 묘사되지만 실제 촬영이 진행된 집의 주인 부부가 푸르게 가꾼 텃밭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원래 설정을 정반대로 바꿨다. 윤단비 감독은 영화가 덕분에 더 풍성해졌다고 귀띔했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집안 곳곳을 막힘 없이 보여주는 카메라 앵글은 관객이 마치 영화 속 가족 틈에 끼어 매 장면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밤중 2층 계단을 내려오던 옥주가, 거실에서 홀로 맥주를 따라놓고 가수 장현의 ‘미련’을 듣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선 할아버지 등 뒤의 큼직한 창문을 통해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전 함께 가꿨을 푸르른 정원이 내다보인다. 굽은 어깨에 내려앉은 쓸쓸함과 그걸 헤아리는 손녀딸 마음이 한 마디 대사 없이 와 닿는다.

윤 감독은 “관객이 집에 함께 있는 것처럼 이 집이 낱낱이 파악되길 바랐고, 촬영할 땐 프레임 때문에 인물의 동선이 방해되지 않도록 몇 장면만 빼곤 클로즈업도 지양했다”면서 “영화 속 가족이 실재하는 것처럼 존재하길 바랐다. 그런 가족 안에 관객 각자의 경험‧기억이 침투할 여지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를 완성시킨 건 '우연히' 날아든 나비

영화 '남매의 여름밤'에서 택시에 탄 옥주가 잠든 동생 동주의 머리를 어깨로 기대게 하는 장면은 동주 역 박승준 배우가 실제 잠들자 최정운 배우가 자연스레 빚어낸 애드리브였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남매의 여름밤'에서 택시에 탄 옥주가 잠든 동생 동주의 머리를 어깨로 기대게 하는 장면은 동주 역 박승준 배우가 실제 잠들자 최정운 배우가 자연스레 빚어낸 애드리브였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순서대로 촬영하며 서서히 극에 젖어 들어설까. 고른 호연 가운데 아역들의 자연스러움이 빛난다. 옥주 역의 최정운은 처음 출연한 단편 ‘빛나는 물체 따라가기’의 말간 얼굴이 윤 감독 눈에 띄어 캐스팅됐다. 동주 역 박승준은 오디션 때 “피곤하다. 자고 싶다”고 해 발탁됐다. “자기표현을 솔직하게 하는 배우”란 윤 감독의 소개. 극 중 가족의 웃음 버튼을 두 번이나 켜는 동주의 막춤 장면은 실제 승준 군이 평소 잘 추는 춤이다.

생각지 못한 우연들이 즉석에서 녹아들기도 했다. “오손 웰즈 감독이 ‘어떤 것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우연이 영화에 들어오도록 관장하는 게 영화감독의 역할이다’라고 했는데 저도 영화 마지막에 누군가의 빈자리에 나비가 우연히 날아든 걸 찍으면서 영화가 이렇게 완성되는구나, 느꼈거든요. 남매가 택시 탄 장면도 좋아해요. 동주 배우(윤 감독은 배우들을 배역 이름으로 불렀다)가 진짜 잠이 들었는데 옥주 배우가 자연스럽게 머리를 끌어당겨줬고 동주가 눈을 마주치고 다시 잠든 거예요. 일부러 주문했다면 인위적이었겠죠. 우연적인 요소들 덕에 영화가 더 풍성해졌어요.”

고전영화에 위로받으며 성장, 제 영화도 위안되길

광주광역시 출신인 그는 “학창시절 오래된 단관극장 ‘광주극장’에서 보곤 했던 일본 거장 오즈 야스지로 등 고전 영화들이 친구가 돼줬다. 명확지 않은 외로움·공허함을 거기서 위로받았다”고 했다. 막연히 좋아하던 영화가 그의 ‘길’이 된 건 대학 영화과(국민대 연극영화과 연출전공)를 가면서다. 어릴 적 자신처럼 이 영화를 무심코 만난 관객이 위안받는다면 가장 기쁜 일일 것 같다며 웃었다.

최근 아이들의 일상을 그린 신인감독들의 성장영화가 주목받는 흐름에 대해선 “사건 중심의 굵직한 이야기가 나왔던 시기가 있었다면 요새는 섬세한 결을 따라가는 영화가 많아졌고 여성 주인공도 늘었다. 이전에 나오지 않았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창작자들의 욕망일 수 있다”면서 “대만 뉴웨이브처럼 하나의 경향으로 발전돼도 좋겠다”고 했다.

“차기작요? 아직은 모르겠지만,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같은 아이들의 모험도 좋아요. 아이들이 성장하는 걸 보면 마음이 든든해지거든요. 연애 소재도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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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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