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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공론화 vs 친문-반문 대결···3년된 靑국민청원 두 얼굴

중앙일보

입력

국민청원 관련 사진 [청와대 제공]

국민청원 관련 사진 [청와대 제공]

청와대 국민청원이 지난 19일로 도입 3주년을 맞았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는 철학으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째 되는 날 시작한 국민청원 게시판엔 지난 3년 동안 약 3억3836만명이 찾았다. 청와대에 따르면, 약 87만8690건의 청원이 올라왔고, 정부는 이 중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청원 178건에 대한 답변을 완료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SNS 메시지를 통해 “정부가 더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우리가 소홀히 해왔던 것들이 국민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가장 많은 동의를 받은 청원은?

국민청원 게시판 이용자들은 3년 동안 총 1억5089만 건의 '동의'를 클릭했다. 첫 해엔 약 3875만 건이었는데 둘째 해엔 4564만 건, 셋째 해엔 6650만 건으로 증가해왔다. 그만큼 매년 이용자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3년 간 국민청원 통계 [청와대 제공]

3년 간 국민청원 통계 [청와대 제공]

이용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동의를 받은 청원은 뭘까? 지난 3월 21일 게시된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였다. 약 272만명의 동의를 받았는데, n번방 처벌 관련 유사 청원 5건의 동의 수를 모두 합하면 500만명 이상이다. 이후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의 성 착취물을 제작ㆍ유포한 혐의로 붙잡힌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은 신상이 공개됐고, 포토라인에도 섰다.

특히 여성의 관심을 받는 이슈가 다수의 동의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故장자연씨의 수사 기간 연장 및 재수사를 청원합니다’(2019년 3월, 74만명 동의), ‘132cm, 31kg의 왜소한 50대 여성이 180cm가 넘는 건장한 20세 남성에게 아무런 이유없이 끔찍한 폭행을 당해 숨졌습니다’(2018년 10월, 42만명),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2018년 5월, 42만명), ‘이수역 폭행사건’(2018년 11월, 27만명) 등이 그 사례다.

청와대에 따르면, 국민청원 1년차에는 남성 방문자 비율이 여성에 비해 12.8%포인트 높았다. 하지만 현재는 남성과 여성의 격차가 4.2%포인트로 좁혀졌다.

부산 한 산부인과에서 간호사가 생후 5일 된 신생아를 거칠게 다루고 있다. [피해 아기 부모 제공=연합뉴스]

부산 한 산부인과에서 간호사가 생후 5일 된 신생아를 거칠게 다루고 있다. [피해 아기 부모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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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사연, 국민청원으로 해결

국민청원은 시민의 억울한 사연들이 공론화되는 계기가 됐다. 2019년 10월 ‘부산 산부인과 신생아 두개골 손상 사건의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피해 아기인 ‘아영이’의 아버지가 올린 글이었다. 아영이는 태어난 지 5일 되던 날 새벽 부산 한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 두개골 골절이 됐다. 아영이 아버지는 간호사의 학대가 의심된다며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국민청원이 공분을 일으키면서 경찰 수사와 의료기관 종사자 대상 아동학대 범죄전력 조회 실시 등 제도 개선으로 이어졌다.

‘강서구 피시방 살인 사건 또 심신미약 피의자입니다’라는 청원은 주취감경, 심신미약 감경의 문제를 사회적 논의로 확대시켰다. 결국 2018년 12월 심신미약자에 대한 필요적 감경규정을 임의적 감경규정으로 변경하는 일명 ‘김성수법’(형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런 사례 때문에 국민청원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소방관들의 오랜 숙원인 소방공무원 국가직화도 국민청원의 힘의로 2020년 4월 현실이 됐다.

정치 세 대결의 장이 되기도

하지만 국민청원은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장이 되곤 했다. 서로 다른 정치 성향을 가진 국민들이 세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다. 지난 2월 국민청원 게시판은 ‘문재인 대통령님을 응원합니다’와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촉구합니다’ 의 대결은 뜨거웠다. 두 청원은 각각 약 150만명과 146만명의 동의를 받으며 국민청원 도입 3년차 동의 수 순위에서 3위, 4위를 기록했다. 국민청원이 정치 진영 간의 여론몰이 수단이 된다는 우려에 힘이 실리는 단적인 사례다.

2019년 11월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고 김민식 군의 어머니 박초희(왼쪽)씨와 아버지 김태양씨 고 김태호 군의 어머니 이소현씨가 '민식이법'이라 불리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전혜숙 위원장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11월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고 김민식 군의 어머니 박초희(왼쪽)씨와 아버지 김태양씨 고 김태호 군의 어머니 이소현씨가 '민식이법'이라 불리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전혜숙 위원장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청원이 촉발한 여론에 떠밀려 졸속 입법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었다. 스쿨존 교통사고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이른바 ‘민식이법’이 대표적이다. ‘민식이법 개정을 청원합니다’는 제목의 국민청원과 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를 계기로 ‘민식이법’ 찬성 여론은 증폭됐다. 그 결과 일사천리로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여야 경쟁적으로 제출한 법안 내용이 뒤섞였다. 과실 사고로 인한 사망사건의 형량이 고의 살인과 비슷해지는 등 법체계와 맞지 않고 형벌의 비례성이 깨졌다는 비판이 제기돼 재개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2017년 국민청원과 관련, “깊은 논의가 필요한 이슈를 즉흥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며 “(여론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 차분한 숙의 과정을 건너뛰게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국민청원이 이미 '제왕적'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대통령의 권한을 더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18년 11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삼권분립 등에 따라 대통령이나 행정부의 권한 밖에 있는 권한(입법권, 사법권 등) 행사를 요구하는 청원이 많다”며 “이에 대한 답변은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청와대는 지난 1월 ‘조국 장관과 가족 수사과정에서 빚어진 무차별 인권침해 조사’라는 제목의 국민청원을 국가인권위에 전달했는데, 당시 인권단체들은 청와대가 “인권위의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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