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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동일지 - 투석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하하하… 호호호… 그 사람 참! 압사당할 뻔했네?”

인공신장실 여자 환자 탈의실에서 함박 웃음꽃이 피었다.
얘기인즉슨 아침에 시력이 나쁜 체구 큰 여자 환자 한 분이 투석을 받기 위해 빈 침대인줄 알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남자 환자분이 누워 계시다가 놀라서“왜 이러십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공신장실은 웃음과 눈물과 감동이 있는 곳이다.

혈액투석이란 간단히 말해 몸 속에 있는 나쁜 노폐물을 인공신장 필터를 통해 제거해 주고 깨끗한 혈액은 다시 몸 속으로 넣어주는 치료이다.

혈액투석을 하기까지는 만성 신부전 진단을 받고 보통 왼쪽 팔에 동·정맥 문합술을 시행한 후 1주일에 2-3차례 병원에서 4시간 동안 혈액투석을 받게 된다.

만성 신부전 환자는 신장이식을 하지 않는 한, 평생 동안 투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환자를 절망에 빠지게 하며 주위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나는 일반병동을 비롯해 중환자실, 특실을 고루 경험한 경력 간호사지만 이곳 신장실은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완치가 없기 때문이다.

“부를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어떻게 보면 여기서 투석받는 환자분들도 전부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투석을 받게 되면 금전적 부담이 크다. 그래서 대부분 경제적 여건이 열악하여 의료보호로 겨우 투석을 받는 환자들이 많다.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한없이 불행하고 슬프다고 생각하면 더없이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이 있다.

바늘을 꽂는 순간 잠이 들어서 마칠 때 눈을 뜨는 자유방임형, 4시간 동안 간호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는 감시감독형, 의사 회진 시 필요한 것 없냐는 질문에 맥주 3병과 안주 1접시를
주문하는 동문서답형, 부종으로 몸무게 몇 킬로그램 빼자고 하면 살이 많이 쪘다며 무조건 체중을 많이 빼달라고 애원하는 왕초보 환자 아줌마, 언제나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 책벌레 아주머니,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들으며 헤 헤 헤… 웃어 보이는 천진난만한 새댁, 이런 저런 모습들에서 나는 진한 감동을 받는다. 아무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행복은 있다는 것을… 행복은 정말 저 멀리 산 너머가 아닌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소한 일에도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렸던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게 된다.

심심해서 연못에 던진 돌 하나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도 있듯이 나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연못에 던져진 돌이 되진 않았을까 조심스레 반성해 본다.

따사로운 봄날이다. 영취산을 온통 붉게 물들인 진달래 만큼이나 아름다운 봄 향기를 병상에 계시는 모든 분들 가슴 가슴에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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