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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헐값 합의 없다” vs “터무니없는 요구”…더 커진 감정의 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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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LG·SK ‘배터리 소송전’을 추적하다

LG화학·SK이노베이션 메인이미지

LG화학·SK이노베이션 메인이미지

17일 기준으로 49일 남았다.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 영업비밀(trade secret)을 탈취했다는 주장에 대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정이 10월 5일에 나온다. 두 회사는 판정 전 합의를 목표로 최근 협상에 돌입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말을 한다. SK 측은 “협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상대가 터무니없는 금액을 기대한다”고 했다. LG 측은 “SK가 진정성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헐값으로 대충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고 했다. “수조 원을 바라는 눈치인데 도둑 심보가 따로 없다.” “도둑질했으면 성실하게 보상을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이처럼 험한 말도 나온다.

ITC 판정 전 합의 추진하면서도 #두 회사의 입장 차 좁히지 못해 #서로 마음 연 진지한 협상으로 #새 성장 동력 포착 기회 살려야

소송전은 지난해 4월 LG화학의 ITC 제소로 시작됐다.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 직원 76명을 채용하며 영업비밀을 빼갔다는 것이었다. 그 뒤 SK 측은 이 제소가 부당하다는 소송과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의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여기에 LG 측의 맞소송까지 벌어졌다. LG화학은 한국 경찰과 검찰에 SK이노베이션을 고소하기도 했다.

그중 핵심인 ITC 건은 외견상 LG화학이 유리한 국면이다. 지난 2월 ITC는 SK이노베이션이 증거를 인멸한 게 인정된다며 LG화학의 예비 승소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두 달 뒤 ITC는 판정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한 해석도 180도 다르다. LG 측은 “재검토는 일반적인 절차일 뿐”이라고 한다. SK 측은 “본안 심사를 하지 않고 예비 판정을 내린 것이므로 결과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베이커 앤드 맥켄지 외국법자문법률사무소의 김시정 변호사는 “둘 다 틀린 말이 아니다. 증거 인멸 문제로 구체적인 내용은 심사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므로 재검토는 하나의 절차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재검토 과정에서 결론이 바뀔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ITC가 예비 판정 결과대로 최종 판정에서 LG화학 손을 들어준다면 SK이노베이션은 큰 상처를 입는다. 한국에서 미국의 SK이노베이션 공장으로 자동차 배터리 생산에 필요한 자재와 부품을 공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 SK는 폭스바겐과 포드에 전기 자동차 배터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따냈다.

“국익 생각해야” vs “기술 보호 중요”

이 분쟁을 보는 전문가들 시각도 완전히 엇갈린다. 한국 기업의 다툼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중국과 유럽의 배터리 업체이니 하루빨리 싸움을  끝내야 한다는 쪽이 있고, 그런 국가주의 산업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LG화학·SK이노베이션 소송전

LG화학·SK이노베이션 소송전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화학공학부 교수는 “LG화학의 제소는 후발 주자 발목잡기라고 본다. 지금은 LG와 SK의 기술이 중국에 앞서 있지만 이렇게 우리끼리 소모전을 벌이면 중국과의 격차가 금세 줄어든다. 스웨덴 배터리 회사 노스볼트에도 한국인 기술자가 널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박철완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도 “영업비밀 침해라고 하는데, 딱히 비밀이라고 할 게 있는지 모르겠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SK가 오히려 앞선 부분도 많다. ITC 건 말고 특허권 침해 소송에서는 SK가 유리할 수도 있다. 인력을 대거 SK로 빼앗긴 LG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 하지만 지금은 때가 너무 안 좋다. 중국의 CATL이 약진하고 있고, 스웨덴의 노스볼트가 유럽 시장을 노리고 있다. 프랑스 기업도 배터리 개발에 뛰어들었다. 국내 1위와 3위 업체가 소송에 매달려 있는 이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반면 손승우 중앙대 산업보안과 교수는 “LG와 SK의 분쟁을 ‘국익’ 차원에서 접근해 조속히 합의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다. 지적재산권을 보호해야 기업 경쟁력이 향상되고 국가 산업이 발전한다. 기술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양국 한양대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SK가 LG에서 이직한 인력을 통해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법을 떠나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 중국과 유럽 기업이 따라오니 덮고 가자고 할 수는 없다. 잘못을 깨끗이 정리해야 기술 개발 투자가 활발히 이뤄진다”고 말했다.

끝나도 끝나는 게 아니다

만약 두 회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ITC가 SK 측에 불리한 판정을 내린다고 해도 곧바로 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ITC가 수입 금지 결정을 해도 그것이 최종적 효력을 갖는 데는 꽤 오랜 시일이 소요될 수 있다. 우선 60일 유예기간이 있다. SK가 공탁금을 걸고 유예를 요청할 수 있다. 또 연방항소법원에 항소할 수 있다. ITC 결정이 우선적 효력을 갖지만 사법 분쟁의 종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시정 변호사는 “만약 항소심으로 가고, 이후에 상급심 소송이 다시 이어지면 미국 법원에서의 싸움이 수년간 계속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ITC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행정부는 SK이노베이션 쪽으로 기울어지는 유혹에 휩싸일지 모른다. 지난 3월 윌버 로스 상무부 장관, 브라이언 캠프 조지아주 주지사 등이 SK이노베이션의 새 공장 기공식에 참석했다. 이 공장은 2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많은 사람이 중국의 배터리 산업 장악에 우려하고 있다”는 대목도 있다. 일자리 확보와 중국 배터리 산업 견제 차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거부권을 쓸 수도 있다는 뜻이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4월에 미국 조지아주에 배터리 공장을 하나 더 짓겠다고 발표했다. 만약 거부권 행사로 ITC 결정이 무력화되면 LG화학은 공연히 분란을 일으켰다는 비난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LG 측은 "ITC의 영업비밀 침해 결정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전기자동차 배터리 사업은 반도체, 자동차, 스마트폰에 이어 떠오른 한국의 미래 성장 동력이다. 머지않아 배터리 시장 규모가 반도체 시장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통상 장기 소송전은 당사자 모두를 멍들게 한다. 진지한, 그리고 마음을 연 협상으로 두 회사가 분쟁 종식의 돌파구를 찾기 바란다.

트럼프 발언 일주일 뒤 합의한 애플과 퀄컴

지난해 4월 미국의 애플과 퀄컴이 2년 이상 지속된 송사를 끝냈다. 양측이 모든 소송을 취소하기로 합의했다. 합의금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훗날 애플이 퀄컴에 50억∼60억 달러(5조9000억∼7조1000억원)를 줬다는 보도가 나왔다.

소송전은 애플이 시작했다. 퀄컴이 모뎀 칩을 공급하며 특허 로열티를 과도하게 받아갔다는 게 이유였다. 퀄컴은 아이폰 공장 도매가의 5%를 로열티로 받았다. 애플은 스마트폰 값에 일정 비율로 로열티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270억 달러(32조원)를 반환하라고 주장했다. 퀄컴은 애플이 특허 로열티 계약을 위반했다며 70억 달러(8조3000억원)를 요구하는 맞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연방법원에 배심원단이 꾸려지고 공개변론 절차에 막 돌입했을 때 이 소송은 막을 내렸다. 애플의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중도 합의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뒤로 물러선 것은 애플이었다.

미국 언론은 애플이 5G 스마트폰에 필요한 모뎀 칩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대안이 없다는 현실 때문에 합의가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당시 애플은 인텔로부터 5G 스마트폰에 들어갈 모뎀 칩을 받을 계획을 세웠는데, 인텔의 개발이 늦어졌다. 중국 화웨이의 모뎀 칩이 대안이 될 수도 있었으나 미·중 무역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합의 발표 일주일 전 트럼프 대통령이 “5G는 미국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주다. 다른 나라가 앞서가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백악관이 분쟁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는 “애플·퀄컴의 합의는 자유시장경제가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도 정부가 국가의 산업 발전을 위해 기업 분쟁에 개입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고 말했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