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자부심 무럭무럭…발레 배우는 필리핀 빈민촌 아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허호의 꿈을 찍는 사진관(20) 

컴패션에는 2006년부터 재능기부로 어린이를 돕는 컴패션밴드라는 자원봉사 그룹이 있다. 이들 중 한 사람인 안무가 장혜림 후원자가 2015년 필리핀컴패션 어린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모습. [사진 허호]

컴패션에는 2006년부터 재능기부로 어린이를 돕는 컴패션밴드라는 자원봉사 그룹이 있다. 이들 중 한 사람인 안무가 장혜림 후원자가 2015년 필리핀컴패션 어린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모습. [사진 허호]

후원이 필요한 해외 어린이를 떠올릴 때, 잘 먹이고 잘 입히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 선입견을 갖기 쉽습니다. 컴패션은 먹이고 입히고 정기적으로 병원과 학교에 보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전인격적 양육 차원으로 접근하지요. 잠재력과 재능을 발견하고 개발하고 건강한 정서를 갖춰나가기 위한 그림과 음악, 운동을 배우도록 합니다. 그럼에도 2010년도였던가 한 어린이센터를 방문했을 때, 발레를 배우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좀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발레복을 입고 다리를 쫑긋 세운 모습은 굉장히 신선하고 귀여웠습니다. 그럼에도 저 가난한 아이들한테 발레를 가르치는 일이 과연 현실성이 있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만나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발레를 배우는 자체로 아이들은 스스로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꿈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부심이 아이들에게 큰 자산이고 선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2015년 컴패션 후원자 중 노래와 무용으로 재능기부하는 자원봉사 그룹인 컴패션밴드와 필리핀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우리가 가기로 한 곳에 발레 프로그램이 있어, 그때 생각이 나 발레 스쿨을 제안했습니다. 컴패션밴드에는 무용가도 있었거든요. 전문가 입장에서 아이들과 호흡하고 가르치면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필리핀에 도착해서 백화점에 들러 발레복을 샀습니다. 사이즈를 몰라 한국에서 준비할 수 없었거든요. 꼬맹이의 발레복을 사느라 백화점을 누비는 얼굴들이 잔뜩 상기되고 흥분돼 보였습니다.

해외 후원을 하면서 아이를 만나는 후원자 마음이야 설레고 기쁜 일이지만, 처음 만나는 낯설음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공통 관심사가 있다면 후원자도 아이도 순식간에 마음이 열리는 계기가 된다.

해외 후원을 하면서 아이를 만나는 후원자 마음이야 설레고 기쁜 일이지만, 처음 만나는 낯설음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공통 관심사가 있다면 후원자도 아이도 순식간에 마음이 열리는 계기가 된다.

드디어 어린이센터에 스쿨이 열렸습니다. 밴드가 가진 다양한 재능이 센터 아이들에게 펼쳐졌습니다. 노래 배우고 싶은 아이는 노래학교로, 피아노나 악기를 배우려는 아이는 연주학교로, 발레 학교를 원하는 아이는 무용가에게 달려갔습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아이들은 감추지 못했습니다. 정말 누가 봐도 예쁜 모습이었죠. 장혜림 후원자와 아이 사진은 그런 장면 중 하나입니다.

발레복을 입은 후원자와 아이가 마주 보고 선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빛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빛이 이들이 있는 공간을 부드럽게 따스하게 꽉 채우도록 했습니다. 커튼이 필터 역할을 한 것이지요.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부드럽게 빛이 퍼지는 장소와 각도가 필요했고, 강하지 않은 색감인 따뜻한 핑크가 은은하게 어우러졌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이 보이지 않았다면 죽은 사진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만나 낯설 수밖에 없었지만 무용을 매개로 정과 사랑이 오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이 마음에 소중한 것이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평생 갖고 갈 꿈을 심어주는 시간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사진에 조화롭게 담기고 있었습니다.

한 분야에서 한창 주목받을 때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바쁜지 잘 아는 나는 한국무용계의 촉망받는 신예가 평소 자원봉사 활동에 꾸준히 참석하고 현지에도 같이 다니는 모습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2018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장혜림 후원자)

한 분야에서 한창 주목받을 때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바쁜지 잘 아는 나는 한국무용계의 촉망받는 신예가 평소 자원봉사 활동에 꾸준히 참석하고 현지에도 같이 다니는 모습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2018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장혜림 후원자)

얼마 전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라는 CBS시사교양 프로그램에 장혜림 후원자가 출연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이었습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무언가를 쏟아낼 줄 아는 한 사람이 주변에 울림과 파장을 일으키는 에너지원의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파장에 따라 결집하고 확고히 서고 사회가 정말 변화하게 되는 것 말입니다.

필리핀 마닐라의 발레교실 참가자 중 한 명이었던 한국무용가 장혜림 후원자는 컴패션을 통해 어린이를 후원하면서 얻은 깊은 관계와 내면의 이야기를 무용으로 창작 작품으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노력해 어느 단계에 이른 전문가가 자기의 깊은 무언가를 다른 이를 위해 쏟아낼 때, 그 영향력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개인사를 들으면서 제가 발레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며 좋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좋기도 했지만, 그 안의 ‘한 사람’을 담게 되어 정말 좋았던 것입니다.

사진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