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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진흙쿠키’먹던 아이티 아이, 의사가 되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허호의 꿈을 찍는 사진관(18)

2013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랑스에서 4시간 차를 타고 간척지에 도착했다. 컴패션 졸업생으로 의사가 되었다는 켄시아가 쉬는 날 컴패션 어린이센터로 자원봉사를 나와 진료를 본다는 지역이었다. [사진 허호]

2013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랑스에서 4시간 차를 타고 간척지에 도착했다. 컴패션 졸업생으로 의사가 되었다는 켄시아가 쉬는 날 컴패션 어린이센터로 자원봉사를 나와 진료를 본다는 지역이었다. [사진 허호]

후원자가 현지에 컴패션비전트립을 가는 목적은 보통 아이들이 어떻게 후원받고 있는지, 컴패션이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아이도 만나는 것이죠. 후원자가 아이들과 어울리고 만나 울고 웃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컴패션의 후원을 받아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나 졸업생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제가 후원한 것은 아니지만,  10년 내외 긴 양육이라는 후원의 결과를 보는 보람과 뿌듯함이 저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그들이 학업을 잘 마치고 좋은 직장을 얻어 지역의 리더십이 되었다는 측면을 떠나, 가난한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함과 선한 영향력, 자신을 억압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힘, 빛나는 눈동자를 보는 일은 우리를 들뜨게 하고 감사하게 하지요.

2013년, 100명의 아이티 어린이를 후원하던 가수 션이 그들을 만나러 간다기에 그 장면을 찍고자 동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일정이 바쁜 그보다 먼저 도착하게 된 우리는 무엇보다도 졸업생들과의 만남을 고대하였고, 아이티컴패션에서 추천하는 졸업생들을 직접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켄시아였습니다.

어린이센터에도 올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픈 아이는 직접 가정으로 왕진을 간다. 앞뒤에서 환한 빛이 이들을 감싸듯 집안을 비춰주어 손주를 향한 할머니의 근심 어린 표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저 켄시아가 어린이를 진료하고 있다는 사실만 전달하고 그칠 수 있었던 사진이 할머니의 눈빛으로 인해 특별해졌다.

어린이센터에도 올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픈 아이는 직접 가정으로 왕진을 간다. 앞뒤에서 환한 빛이 이들을 감싸듯 집안을 비춰주어 손주를 향한 할머니의 근심 어린 표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저 켄시아가 어린이를 진료하고 있다는 사실만 전달하고 그칠 수 있었던 사진이 할머니의 눈빛으로 인해 특별해졌다.

2009년 처음 아이티를 방문하기 전 TV 프로그램에서 아이티의 ‘진흙쿠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에게 진흙을 쿠키처럼 구워 준다는 이야기는 정말 큰 충격이었죠. 아이티에 도착해 직접 확인하고 싶어 주민들한테 물어봤더니 진짜 시장에서 돈을 받고 팔고 있었습니다. 진흙에 약간의 버터와 소금을 섞어 쿠키 같은 모양으로 팔더군요. 차마 먹어보지는 못했습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원조국 중 한 나라였던 아이티는 오랜 식민지 생활을 겪으며 울창한 산림과 자원이 풍부했던 국토가 민둥산이 되어 헐벗었을 정도의 비인도적인 수탈을 당했습니다.

가난과 기아, 절망이 가득했는데 켄시아를 만나러 간 간척지 같은 곳의 첫인상이 아이티에서 받았던 황량함이 더욱 짙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후원을 받는 아이들의 표정은 역시나 밝고 생기가 넘치더군요.

켄시아는 컴패션 졸업생이었고 의사였습니다. 평일에는 포르토프랑스에서 의사로 주말에는 컴패션 어린이센터들을 돌며 자원봉사를 다녔습니다. 컴패션이 있는 곳이 빈민가니까 자신이 나고 자란 바로 그런 빈민가 사람들을 돕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아이티의 컴패션 졸업생 중에는 유독 의사나 간호사가 많았고, 켄시아뿐 아니라 그들 중 상당수가 빈민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컴패션 어린이들에게 꿈을 물었을 때 많은 어린이가 ‘의사’나 ‘간호사’를 적어내기도 했습니다. 아이티에 같이 갔던 드라마 작가 문희정 후원자가 이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솔직하고 더 잘 안다고. ‘아이티는 아직 아프다’고요.

또 한 명의 컴패션 졸업생을 만났다. 월디라는 이름의 어린이센터 센터장이었는데, 시장에서 어린이 줄 음식 재료를 사러 나왔다가 강도를 만나 총상을 입고 장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 시장에서 어린이들 줄 음식 재료를 산다.

또 한 명의 컴패션 졸업생을 만났다. 월디라는 이름의 어린이센터 센터장이었는데, 시장에서 어린이 줄 음식 재료를 사러 나왔다가 강도를 만나 총상을 입고 장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 시장에서 어린이들 줄 음식 재료를 산다.

월디라는 컴패션 졸업생은 포르토프랭스의 어린이센터 센터장이었는데 목발을 짚고 나타났습니다. 아이티는 원래 대낮에도 무장강도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날 정도로 치안이 불안했습니다. 그 역시 어린이들에게 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시장에 나갔다가 무장강도에게 몸에 3곳에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수술하긴 했지만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습니다.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지만 아이들 간식을 사러 시장에 나가야 한다고 해서 더 붙잡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의 행선지가 자신이 총상을 입은 시장이라는 것에 저는 잔잔한 충격 같은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큰 사건을 당하면 그 장소에 가지 싫다든지, 그 직업을 떠나 대개는 다른 안정된 직장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큰 아픔을 경험하고도 다시 그 현장을 찾아가는 장면은 복잡한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켄시아나 다른 의사, 간호사들 역시 결국 자신의 어린 시절의 아픔을 고스란히 다시 겪고 감내해야 할 바로 그런 지역으로 자원봉사를 가는 것입니다. 후원자의 한 사람으로서 후원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이들의 소명의식은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나의 아픔을 뛰어넘는 것까지 도울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아직 답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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