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이후…] 中. 신뢰 무너진 의료현장

중앙일보

입력

가정의학과 개원의 K씨는 최근 단골환자에게 무안을 당했다.

감기치료차 왔던 이 환자는 대뜸 보험공단에서 받은 수진내역서를 내밀며 시골에 내려간 시어머니가 고혈압 치료를 받은 것으로 돼있다는 것이었다.

허위청구를 한 것이 아니냐는 항의였다. 그러나 며느리 몰래 시어머니가 K씨에게 진료를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까스로 오해가 풀렸다.

의약분업으로 처방전이 공개되고 보험재정 파탄으로 부당청구 감시가 본격화하면서 환자와 의사간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진료비와 치료행위를 둘러싼 민원이 의약분업 실시 직후인 지난해 7월보다 두배 가까이로 늘어났으며 전화문의만 하루 10여통에 달한다고 밝혔다.

의료사고로 인한 민원제기도 급증하고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은 1999년 월평균 6백30건이었던 민원이 올해엔 월평균 1천1백여건으로 두배 가까이 된다고 밝혔다.

상담내용도 과거에는 후유증 등 의사의 과실을 따지던 것이 요즘은 치료결과에 대한 불만이나 진료비 과다청구 등으로 바뀌고 있다.

◇ 부당청구에 대한 시각차=건강보험 재정파탄으로 불거진 수진내역 조회가 불씨가 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의사들의 부당청구를 재정파탄의 원인으로 보고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기 때문이다.

신고한 환자에겐 부당청구액이 1만원 미만인 경우 3천원, 이상일 경우 최고 30만원 한도 내에서 30%를 포상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도 최근 이례적으로 윤리위원회를 열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부당청구 의사 92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6개월간 회원자격 정지란 벌칙을 가했다.

의료계 일각에선 부당청구가 대부분 고의가 아닌 보험청구 과정에서 생긴 과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의협관계자는 "자체 조사 결과 고의성을 띤 상습적인 부당청구는 전체 의사 숫자의 0.2%에 불과했다" 고 밝혔다.

부당청구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다.

내과의사 K씨는 "감기환자나 소화불량 환자도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부작용이 거의 없는 바륨 등 신경안정제를 처방할 수 있다" 고 말했다.

보험청구만을 위해 감기환자를 정신병 환자로 몰아가는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치료를 위해선 가능한 처방이라는 것.

◇ 늘어나는 과잉진료=평소 두통으로 고생해온 직장인 L씨는 의사에게서 뇌종양일 수 있으니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뇌혈류초음파검사와 자기공명영상촬영검사(MRI)를 받고난 뒤 50만원을 내야 했다.

그러나 검사 결과 확인된 병명은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성 두통. 진통제 몇알을 처방받은 것이 전부였다. 억울한 생각이 든 L씨는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의사가 과잉진료를 했다는 민원을 제기 중이다.

신경과 전문의 L씨는 "갑자기 시작되는 발작 두통이나 구토가 동반되는 두통 등 뇌종양을 암시하는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진료수익만을 위해 검사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고 털어놨다.

과잉진료는 사실 여부를 객관적으로 밝혀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부당청구보다 더욱 심각하게 환자와 의사간 신뢰를 해친다.

의사들은 초음파 등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 검사들을 은연 중에 종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환자들은 믿을 만한 의사들을 찾아 닥터쇼핑에 나선다.

◇ 문제점과 대책=수진내역 조회를 통한 현행 부당청구 감시는 효과에 비해 사회경제적 부담이 큰 방식이다.

개원의 K씨는 "지난해 11월 손가락 피부가 찢어진 환자에게 봉합수술을 시도한 결과 총 진료비가 1만2천9백90원인데 환자가 1만3천원을 냈다는 이유로 보험공단 직원이 나와 실사를 벌였다" 고 밝혔다.

불과 10원 때문에 출장 나온 직원이 환자기록부와 청구명세서.본인수납대장을 복사해가는 소동을 벌였다는 것.

지금처럼 비용유발형 투망식 단속보다 부당청구 유형을 분류한 뒤 사안별로 샘플을 정해 조사하되 고의성이 적발될 경우 엄중한 처벌을 가하는 방식이 타당하다는 것.

과잉진료 차단을 위해선 법과 제도에 앞서 의사들의 자정노력이 요구된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는 "진료수익만을 위한 검사, 검증 안된 치료나 환자유치 등 과잉진료를 일삼는 의사들은 의사들이 더 잘 안다" 며 "환자는 물론 의료계 전체를 위해서도 과잉진료의 시정이 시급하다" 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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