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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비 협상 대표 교체날, 주독미군 감축 트럼프 "호구 되기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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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의 미측 대표인 제임스 드하트 미 국무부 정치군사국 선임보좌관이 지난해 12월18일 서울에서 열린 5차 협상을 마치고 서울 용산구 미국 대사관 공보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의 미측 대표인 제임스 드하트 미 국무부 정치군사국 선임보좌관이 지난해 12월18일 서울에서 열린 5차 협상을 마치고 서울 용산구 미국 대사관 공보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이 장기 교착상태인 가운데 미국 정부가 제임스 드하트 협상 대표를 다른 자리로 이동시켰다. 드하트 대표는 지난해 9월부터 올 3월까지 한국과 7차례 협상을 진행한 인물이다.

미 국무부 후임 언급 없이 "한국 기여 더 해야"

미 국무부는 29일(현지시간) 드하트 대표를 국무부 북극권 조정관 겸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과 스티븐 비건 부장관의 수석 고문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북극권 조정관은 러시아와 중국의 북방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오바마 정부 때 만들어진 자리였지만, 트럼프 행정부 들어선 공석 상태였다. 중국과 전략 경쟁을 의식한 인사로 풀이된다.

드하트 대표의 후임 인선은 아직 발표하지 않았다. 국무부 대변인은 한국 언론들의 질의에 “미국은 한국과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전념하고 있다”며 “한국이 공정한 분담을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논평을 냈다. 기존 SMA 관련 입장과 동일하지만, 한때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왔던 올 상반기와 비교하면 ‘원점 회귀’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정은보 한국 SMA 특별대표와 드하트 대표는 지난 3월 말 기존의 1조 389억원(제10차 SMA 타결 총액)에서 약 13%를 인상하는 방안을 합의한 적이 있다. 이 합의안엔 미국이 지난해 9월 첫 협상 때 제시했던 50억 달러(약 6조원) 수준의 요구 내용의 대부분이 빠져 있었다. 미측은 11차 SMA 협상을 개시하면서 주한미군의 순환배치 비용을 비롯해 정찰ㆍ감시자산, 미사일 방어체계 등 한국이 보유하지 못한 보완전력(bridging capabilities)의 ‘이용료’로 볼 수 있는 항목들을 청구서에 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항목에선 한국이 원하는 쪽으로 맞추고, 총액은 외환위기 이후 최대 폭인 13% 인상하기로 결론을 냈다. 이 때문에 “미국의 터무니 없는 호가 전략이 통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폼페이오와 강경화 외교 장관 등 장관급에서 합의한 이 안을 막판에 트럼프 대통령이 엎어 버렸다. 그리고 약 50% 인상한 13억 달러(1조 5000억원 가량) 수준을 다시 제안했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후 미측은 여러 조합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한국 협상팀은 기존 합의안을 고수 중이다. 1조 389억원에 매년 13%를 3년간 인상하는 이른바 '타협안'과 관련해서도 한 소식통은 “유의미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미측이 한 번 수용했던 양측 합의안을 일방적으로 깬 만큼 한국이 먼저 움직일 수는 없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드하트 대표의 교체로 방위비 문제가 이미 실무팀 손을 떠났다는 평가도 나온다.

관건은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다. 11월 대선 전 한국과 방위비 협상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주한미군 감축 등 '돌발 카드'를 꺼낼 수도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나온다. 앞서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회고록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주둔과 한미 연합훈련을 철저히 돈 문제와 연계시키려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같은 날 미 국방부는 주독미군을 1만 2000명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 트럼프 대통령은 “독일이 돈을 내지 않고 있어서 줄이는 것”이라며 “더이상 호구(sucker)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30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동을 마친 뒤 문재인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해 6월 30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동을 마친 뒤 문재인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결국 방위비 협상이 타결의 물꼬를 트지 못한 상태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하반기 주요 7개국(G7) 회의나 유엔총회 때 이 문제를 곧장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방패와 창’ 드하트 VS 정은보=전례 없이 장기화한 이번 협상은 진행 과정 역시 과거 협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3차 협상 때엔 둘째 날 대뜸 드하트 대표가 “더이상 협상을 못 하겠다”며 협상장을 박차고 나갔다. 미측은 앞서 50억 달러에 육박하는 비용을 제시한 뒤였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드하트를 비롯한 미측 대표팀은 이미 짐 보따리를 싸 가지고 협상장에 왔다고 한다. 한국에 미측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협상 결렬 카드를 미리 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한·미는 SMA 협상 과정에 대해선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통상 외교 협상 과정이 비공개이긴 하지만, 동맹 간에 돈 얘기로 옥신각신하는 모양새를 노출하길 꺼렸던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협상에선 미측이 전례 없는 인상 폭을 요구하고 나선 만큼 드하트 대표는 한국의 언론·국회 사이드를 전방위로 접촉했다. 12월 서울 협상 직후엔 취재진을 미 대사관으로 불러 미측의 요구사항을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이 같은 전방위 여론전을 놓고 “외교부 협상팀이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협상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드하트 대표의 여론전에 정은보 한국 대표도 “미측의 역외 요구는 수용 못 한다”는 맞불 기자회견을 곧이어 열기도 했다.

정은보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한국 대표가 올해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7차 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정은보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한국 대표가 올해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7차 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미측의 협상 전략에 맞서 한국도 처음으로 기획재정부 출신 정은보 대표를 앞세우는 전략을 썼다. 민간인 신분인 정 대표는 무보수로 소정의 여비만 받은 채 활동했는데, ‘예산 깎기의 달인’ 답게 이번 협상에서 철저히 동맹 이슈를 배제한 채 돈 문제로만 접근했다고 한다. 한·미가 미측의 50억 달러 요구를 꺾고 10억 달러 선까지 내려오게 된 것도 이런 전략의 효과라고 정부는 자평하고 있다.

◇주독미군 다음은 다음 타깃은 한국?=트럼프 대통령은 주독 미군을 줄이기로 하면서 독일을 콕 집어 “체납자”라고 지칭했다. 방위비와 미군 주둔을 직접 연계시킨 것이다. 다음 타깃이 한국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대목에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6월 3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린 장병 격려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6월 3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에서 열린 장병 격려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 문제와 방위비는 별개 문제"라며 애써 분리하려는 기류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달 초 내신 기자단 간담회에서 ’방위비와 연계해 주한미군 감축이 현실화됐을 때 한국의 전략적 입지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중앙일보 질의에 “SMA를 넘어서도 한미 간에 주한미군의 규모 문제 관련해서 논의된 바가 없다”며 “주한미군 규모는 양 국방 당국 간 연례 안보협의회(SCM)를 통해 현재 규모를 유지한다는 공약을 매년 확인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4월 청와대 관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통화하고 있는 모습.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4월 청와대 관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통화하고 있는 모습. [사진 청와대]

트럼프 대통령의 탄탄하지 못한 재선 가도도 한국 정부가 선제대응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폭 인상안을 섣불리 받아들였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면, 한국으로선 되돌리기 어려운 결과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이유정ㆍ백희연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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