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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인쿠나불라와 집현전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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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

인류 역사 최대의 수수께끼 중 하나는 변경 유럽이 어떻게 근대 이후 과학과 이성, 문명과 자본주의 발전의 세계 선두로 부상하였느냐, 그리고 세계의 중심으로 장기 패권을 장악하였느냐는 점이다.

유럽 인쿠나불라와 세종 집현전 #문명혁신과 창조의 혁명적 계기 #지식국가·문화국가로 도약 위해 #디지털 집현전 설립과 소통 필수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서양의 특질에 대해 매우 독특한 해석을 던진 바 있다. ‘보편’이 아니라 ‘예외’와, 예외의 수용 노력이 서양에게 무한한 역동성을 주는 동기부여 요소로 작동하였다는 것이다. 보편을 자임하지 않은 서양은 예외에게 활동 공간을 제공하였고, 그것은 근본적인 파괴와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였다.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혁명이었다.

서양의 항구적 동요와 지속적인 불만족은 이에 근거한다. 즉 그것은 서양에게 높은 수준의 정신적 에너지와 자유, 지칠줄 모르는 탐구와 발견, (타인) 체험의 흡수를 가능케 한 항상적인 정신적 정치적 긴장 때문이었다. 예외의 인정과 수용으로 인한 서양의 내적 긴장과 동력이 문명 대역전과 대도약의 근거였던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도 같은 해석을 견지한다. 숫자·화약·대포·나침반·종이·양잠·인쇄술·항해술.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 요소들은 중국, 인도, 팔레스타인, 이슬람을 포함해 서양 밖에서 온 것들이었다. 유럽에 존재하던 것들조차 밖의 것들이 앞서 있었다. 실제로 서양은 훗날 세계의 준거로 추구한 요소들을 거의 전부 밖으로부터 흡수하였다. 자신들의 식민지 종교였던 기독교는 종이와 숫자보다 훨씬 더 상징적이다. 유럽을 제외하면 어느 문명과 종족도 식민지 한 귀퉁이의 부족 종교를 보편 국교로 받아들인 사례는 세계에 아직 없다.

그러나 야스퍼스와 브로델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흡수에 이은 내부 동학이었다. 즉 흡수를 통한 철저한 자기 부정과 내부 혁신이었다. 기독교도 화약도 대포도 그러하였다. 원조(元祖)는 결국 간단하게 추월당했다. 그러고는 자기로부터 나간 문명의 이기로 인해 외려 침탈을 당했다. 브로델에 따르면, “중국 대포는 진화할 줄을 몰랐고, 그렇게 할 수 없었으며, 전쟁의 요구에 맞추어 적응하지 못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문예부흥, 종교개혁, 이성주의, 과학주의, 시민적 인민주의, 지리상의 조우, 대항해시대가 집중 등장한 이른바 근대의 탄생 시기의 문명 역전이었다. 그것은 이 시대의 폭발적인 지식혁명·정보혁명·인쇄혁명·소통혁명 때문이었다. 종이와 금속활자-인쇄술의 결합은 종교와 사상, 지식과 정보, 과학과 이성, 의견과 소통의 대폭발과 대분출을 가져왔다.

필사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요람·시작의 뜻을 갖는 이른바 ‘인쿠나불라’(incunabula)였다. 1500년경에는 유럽 주요 도시들에 모두 인쇄 작업장이 있었다. 종교·고전·철학·과학·천문·지리·문학·생물. 인쿠나불라가 초래한 파장은 혁명적이었다. 러시아를 포함해 유럽인구가 아직 1억명 정도일 때 인쇄책자는 무려 1억4천만~2억권에 달했다. 시민적 인문주의의 한 토대였다. 물론 이전 시기 동안 인쇄술과 금속활자는 동양이 더 앞서있었다.

유럽의 인쿠나불라와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도 인문·지식·농업·국방·천문·과학·의료제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세종대였다. 집현전 설치를 통한 국가 지식역량의 결집과 집적, 축적과 연결, 편찬과 확산은 한국 문예부흥을 가능케 하였다. 나라가 곧 집현전이었다. 지식체계의 정비도 놀라웠다. 인쿠나불라와 같은 혁명적 효과를 초래한 절정은 단연 한글 창제였다.

디지털 뉴딜에 대한 최근 정부의 선언과 정책, 기업과 사회의 담론들은 한국사회의 비전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하다. 늘 흡수하던 변경·경계로부터 보편과 표준으로 도약하려는 꿈이다. 융합과 혼융은 우리의 최고 특장이 아닌가. 그러나 단순한 기술과 정보연결을 넘어 인간과 사회, 문화와 교육 전체에 대한 인쿠나불라 혁명과 지식혁명, 집현전 혁명과 한글창제 혁명을 깊이 유념하자. 정부-대학-연구-기업-지방이 전방위 지식 콘텐츠로 연결·소통하는 대(大)집현전을 구축하자. 즉 지식혁신과 교육혁신, 사회혁신과 지방혁신이 같이 갈 21세기 인쿠나불라 혁명과 디지털 집현전을 제안한다.

청년과 교육, 지방과 공동체가 함께 살아나고 함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경로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정치·관료·기업대표는 디지털 뉴딜의 발표자들로 초대되었으나, 지식과 교육을 대표하는 학자와 대학총장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은 집현(集賢)에 부족하다. 우리에겐 스탠포드 대학과 실리콘 밸리를 연결했던 존 헤네시 총장과 같은 창의적 지식 혁신가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21세기 디지털 집현전을 통해 지방도 청년도 교육도 희망을 잃은 이 시대에 생명과 인간성 회복을 향한 큰 출구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문명은 늘 변경으로부터 발원하였다. 예외는 없었다. 공동체 전체를 디지털 집현전으로 연결하는 발상을 통해 모든 시민이 고루 인문과 지식, 생명과 문화의 혜택을 누리는 문화국가를 만들어보자.

박명림 연세대교수·김대중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