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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문 대통령의 비정한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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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The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에서 침묵은 ‘말하지 않고도 말하고, 듣지 않고도 듣고, 속삭인다’고 노래했다. 그래서 침묵은 상징의 언어다. ‘박원순 성추행 의혹’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침묵하지만 세상을 향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를 전략적 계산이 깔린 ‘침묵 정치’라고들 한다.

‘박원순 의혹’에 2주째 침묵정치 #성난 민심에 동의 않는다 해석도 #진영 논리 앞세운 2차 가해 난무 #성폭력 진실 규명에 목소리 내야

문 대통령의 침묵은 선택적이다. 적과 동지, 네편과 내편에 따라 결정된다. 지난해 3월 이른바 ‘적폐’들을 겨냥한 장자연·김학의 사건의 재수사를 지시하던 때는 다들 보란 듯이 소리쳤다.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말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지난 9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 이후 2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말이 없다. “오랜 인연을 쌓아온 분이라 충격적”이라는 전언과 함께 상가에 조화를 보냈지만, 피해자의 아픔에 대해선 지금껏 단 한마디도 없다. 성추행을 당한 서울시장 여비서는 적폐도 네편도 아닌데 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대통령이 외면하는지 궁금하다.

대통령의 침묵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박원순의 이중성에 성난 민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 이유가 마초적 의리의 발로일 수도, 어느 진보학자의 표현처럼 “100조원 있어도 복원 못 하는” 인물이라고 믿기 때문일 수도, 권력형 성폭력보다 개인적 일탈이며 그 망신을 죽음으로 갚았으니 ‘사건 종결’로 봤을 수도 있다. 부동산 정책 실패 등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선한 정권’의 추락을 막으려는 말 없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서울시장(葬)으로 추모 열기를 띄우고, ‘피해 호소인’이란 말장난을 창조해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2차 가해를 모른 척하는 걸 보면 대중의 변덕과 망각을 기다리겠다는 심사가 읽힌다.

가해자를 동정하는 듯한 대통령의 침묵은 무언(無言)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문빠 세력은 “우리 진영을 사수하라”는 메시지로 이해한다. 대통령의 침묵 속에 나라를 두 동강 낸 조국·윤미향 사태의 판박이처럼 흘러가고 있음이 그 방증이다. 진저리나는 진영의 이분법 논리가 작동하고 어용 나팔수들이 음모론을 퍼뜨리며 설쳐대는 현상도 똑같다.

청와대 청원에 ‘사자명예훼손 엄중히 처리해달라’며 떼로 몰려가고, 피해자를 ‘이순신 관노’ ‘꽃뱀’에 비유하는 저급한 부류의 언행은 무시한다고 치자. 좀 배웠다는 인간의 모습은 더 서글프다. ‘성추행 증거’를 대라고 공격하고, 박 전 시장과 팔짱을 낀 사진을 올리고 "나도 성추행했다”고 조롱하고, 정작 ‘미투’ 운동을 촉발했던 여성 검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실종’ 상태다. 내로남불을 훈장과 출셋길로 여기는 비열한 세태가 대통령의 침묵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힘을 가진 자만이 말할 권리와 말하지 않을 권리를 독점하는 게 침묵의 법칙이다. 무섭도록 차가운 대통령의 권력형 침묵은 정권 차원에서 몸을 사리도록 조직적 침묵으로 이끄는 묵시적 압박이다. "예뻐서 그랬겠지”라는 서울시, 수사 의지를 의심받는 경찰, 사냥개와 애완견 사이를 정치적으로 줄타기하는 ‘추미애의 검찰’, 그 어디에 가도 진실의 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고 폭로한 게 5월 7일의 일이건만 70일이 지나도록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는 건재하다.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침묵의 형태로 고집하는 한 진실 규명은 회의적이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공정한 법의 보호 받고 싶었다”던 피해자의 외침은 허공을 맴돌고 있다. 권력자를 위해 ‘심기의전’에다 ‘기쁨조’ 노릇을 하고, 속옷까지 챙겨 주는 비정상의 사회를 바꿔 달라는 젊은 여성의 절규가 애처롭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평상시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주장이다”(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는 말로라도 위로해야 하나.

‘침묵은 폭력이다’(Silence is Violence). 미국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때 인종차별에 침묵하는 방관자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시위대가 외친 구호다. 문 대통령에겐 무심한 침묵이겠지만 피해 여성에겐 간접적인 폭력일 수 있다. 선과 악, 진실과 위선이 너무도 분명한 사회적 쟁점에서 모호한 침묵을 택하니 사회 혼돈은 깊어지고 갈등은 날카로워진다. 안희정·오거돈에 이어 박원순까지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정권 차원의 도덕성이 심각하게 고장 났음을 경고한다. ‘인권 변호사’ 출신 대통령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은 바로 성평등한 세상”이라고 단언했다. 국정 최고책임자라면 불편한 질문에 입을 열고 답할 의무가 있다.

다시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당신이 지치고 초라하다 느낄 때/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일 때/내가 닦아 줄게요.’ 피해 여성과 그를 지지하는 민심은 침묵을 깨고 다리가 되어줄 대통령을 기다린다. 문 대통령의 비정한 침묵은 2차 가해와 다름없다.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