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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한컴, 금·마스크도 팔고 노인요양원도 운영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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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4년.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가 된 지 1000년째를 기념해 1994년 남산골 한옥마을에 묻은 타임캡슐이 열린다. 그 속엔 1990년대를 상징하는 무선 전화기와 삐삐, 김건모 앨범 외에도 '아래아한글(2.5버전)'이 있다. 1989년 처음 나온 토종 워드프로세서로, 당시 아래아한글은 외국산(마이크로소프트 워드프로세서) 대항마 역할을 했다.

이걸 만든 기업 한글과컴퓨터(한컴)도 1990년 창업 후 20년간 아래아한글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컴의 행보가 확 달라졌다. 한컴그룹 내 13개 계열사들은 영국 수사기관에 모바일 포렌식 기술을 수출하는가 하면, 마스크 공장을 세우고, 인공지능(AI) 돌봄 로봇이 돌아다니는 노인 요양원을 운영한다. 지난달엔 블록체인 기반 금 거래 사업에 진출한다는 소식도 알려졌다.

IT업계에서도 한컴의 변신이 화제다. 한컴과 함께 판교테크노밸리에 위치한 한 IT기업 관계자는 "일관된 컨셉을 만드는 것이 과제겠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업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여러 시도를 하는 모습은 고무적이다"라고 했다. 한컴그룹이 그리는 '빅 픽처'는 무엇일까.

한글과컴퓨터 10년간의 실적.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한글과컴퓨터 10년간의 실적.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김상철의 M&A 경영

인수합병(M&A) 전략의 중심엔 김상철 한컴그룹 회장이 있다. 김 회장은 이 회사의 9번째 주인이다. 8번이나 오너가 바뀌며 부침을 거듭한 한컴을 2010년 인수했다. 그는 IT를 전혀 모르는 '컴맹'이었지만 지금은 한컴을 다시 세웠다는 평을 듣는다.

김 회장은 평소 "특정 분야에만 집중하면 그 산업이 가라앉을 때 기업도 같이 흔들린다. 여러 사업에 진출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며 분산투자를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2010년부터 2017년까지 각종 소프트웨어·하드웨어 분야에서 뛰어난 기초 역량을 지닌 1위 사업자들을 사들였다. 한컴 관계자는 "잦은 오너 교체로 회사에 냉담했던 직원들도 이 시기를 지나며 기력을 되찾고 사업도 적극적으로 제안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상철 한컴그룹 회장 [중앙포토]

김상철 한컴그룹 회장 [중앙포토]

HW·SW 결합…코로나19에도 최대 실적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소프트웨어 밖으로 눈을 돌렸다. 업력 47년의 안전장비 국내 1위 기업 '산청(현 한컴라이프케어)'을 2650억원에 인수했다. 안전장비에 IT기술을 접목해 선진국 수준의 스마트 세이프티 시장을 열겠다는 목표였다. 현재 한컴라이프케어는 방역마스크, 군용 방독면, 소방방화복 등 100여개 이상의 안전장비를 생산한다. 특히 마스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를 계기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덕분에 지난 3월엔 마스크 제조사 한 곳을 인수하기도 했다. 연간 1억장까지 자체 생산 가능한 설비를 갖추기 위해서다.

2018년엔 스마트시티를 차세대 먹거리로 찍고 통합 플랫폼을 선보였다. 도시 곳곳의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사물인터넷(IoT), 데이터를 분산 저장하는 블록체인 등이 들어갔다. 그룹 연매출도 2017년 1212억원에서 2019년 3193억원으로 끌어올렸다. 코로나19 위기에도 올해 1분기 매출 884억원, 영업이익 144억원으로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달성했다.

한컴그룹 ‘신사업 법인’연대기.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한컴그룹 ‘신사업 법인’연대기.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경험 못 해본 생태계 만들어야 생존"

한컴그룹이 '이 중에 하나만 걸려라'식 사업전략을 짜게 된 건 최근 10년간 급변한 기술 트렌드 때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AI)·블록체인 등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깨는 기술을 화수분 같은 기회로 봤다.

김 회장은 스마트시티 진출 당시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워드프로세서 하나가 중요한 때가 아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 체질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달 디지털 금 거래에 뛰어든 것도 새로운 기회이니 일단 들어가자는 그의 의지가 컸다. 자산으로서 금의 가치가 큰 데도 디지털 거래는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점을 기회로 본 것이다.

'토종' 딱지 벗고 해외로

한컴의 최대 약점 중 하나인 매출구조도 체질 개선에 들어갔다. 김 회장은 지난해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10여 개국을 직접 돌았다. 국내 매출이 90% 이상인 한컴의 수익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다. 올해 CES에서 그는 "아마존과 협업해 세계 오피스SW 시장에서 0.4% 수준인 한컴 점유율을 5%까지 끌어올리겠다. 이 경우 1조2000억원 매출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컴은 2018년부터 아마존웹서비스(AWS)에 한컴오피스의 문서 편집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중국과는 AI와 드론 분야에서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지난해 중국 4대 AI 기업 아이플라이텍과 합작법인 '아큐플라이 AI'를 설립하면서다. 이 회사는 중국이 코로나19 대응에 활용했던 AI 콜센터 기술을 전수받아, 여러 자가격리자에게 동시에 콜을 보내 발열·체온·기침 등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한컴 AI 체크 25'를 개발했다. 한컴은 AI 콜센터를 연내 금융사 등에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2세 경영 신호탄

김연수 한컴그룹 그룹운영실 부사장 [사진 한컴그룹]

김연수 한컴그룹 그룹운영실 부사장 [사진 한컴그룹]

김 회장의 이같은 확장 전략은 2세 경영으로 더 힘을 받을 전망이다. 지난 5월 한컴그룹은 김상철 회장의 장녀인 김연수 전략기획실장을 부사장으로 선임했다. 김 부사장은 그간 한컴MDS, 한컴위드의 M&A 실무를 맡으며 M&A 전문가로 성장했다. 김 부사장과 김 회장은 지주사인 한컴위드에 각각 지분 9.07%, 15.77%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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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kim.jugn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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