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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 함부로 차는’ 당신…‘나에게 묻는다’ 되새기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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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호 22면

시로 읽는 세상 

서정시는 세상과 동떨어진 언어 세공이 아니다. 아름답고 서늘한 시의 언어 속에는 현실과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풍자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거꾸로, 서정시를 읽으면 세상이 보인다. 서정시인 이영광의 ‘시로 읽는 세상’을 시작하는 이유다. 시인이 읽은 세상, 시에 나타난 세상 이야기다.

혼란·다툼 만연, 분위기 어수선 #원인 밖에서 찾는 ‘남 탓’이 문제 #내면으로 시선 돌려 반성하는 자세 #안도현 시 ‘너에게 묻는다’서 발견 #윤동주 ‘서시’에도 오랜 성찰 물씬

매 학기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시를 적어 내라고 한다. 그걸 보고 강의 계획을 조정하기도 하고 교재의 작품 구성을 바꾸기도 한다. 신입생들이 좋아하는 시 중에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석 줄짜리 짧은 시다. 추운 겨울 음식을 익히고 집을 덥히다가 숨이 다해 버려진 연탄재를 빌려서, 사람들 사이에 따뜻한 인정이 흐르길 바라는 마음을 간결하게 적은 시라고 말한다. 학생들과 함께 읽으며 이 얘기 저 얘기 나눈다. 감동적이라는 반응도 있고, 화자의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려와 교사 앞에 선 학생 같아진다는 이견도 나온다.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런 생각들을 나누다 보면 시의 나무라는 듯한 어조를 검토해 보게도 되고, 그래서 화자와 청자를 바꿔 읽는 분위기가 생겨나기도 한다. 시는 본래 감추면서 보여 주는 글이고 시인이 이를 잊지는 않았을 테니 이 시의 ‘너’에는 아마도 ‘나’가 숨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작품의 제목을 ‘나에게 묻는다’로 고쳐서 읽게 된다. ‘너에게 묻는다’는 괜찮은 시인데 겸손한 목소리를 담은 ‘나에게 묻는다’는 더 괜찮은 시이리라는 생각에 함께 닿으면 시 읽기가 끝난다.

요즘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접하다 보면 새삼 나에게 묻는다는 말을 곱씹게 된다. 다수가 모여 사는 곳엔 늘 혼란과 다툼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이해 갈등과 견해 차이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언어 충돌이 일어나고, 높고 거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와 적이 우려스럽다. 대개 너에게 묻는 말들이다. 너에게 묻는다는 건 자기 문제의 원인을 밖으로 돌린다는 뜻이다. 반대로, 나에게 묻는다는 건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고 말과 행동의 계기들을 엄히 살피고 고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나에게 묻는 태도가 지금 필요하지 않을까. 법무부의 수장을 지낸 이의 온 가족이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 하여 법정에 서기도 하고, 오래 인권운동에 몸담아 온 국회의원이 대의와 사익 사이에서 원칙을 잃지 않았나 의혹을 사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말과, 그것의 진실성 여부를 두고 지지하는 이들과 비난하는 이들 사이에 오가는 말들이, 높건 낮건 다 너에게 묻는 말 같다. 너에게 묻는 이는 법의 좁은 테두리 안에서 다투려 하고, 나에게 묻는 이는 내면의 도덕을 두렵게 반성하려 한다.

『장자』의 ‘덕충부’ 편에는 장애인들이 많이 나온다. 알고 보면 다 도 닦는 자들이고 멀쩡한 이들보다 더 멀쩡한 이들이다. 그중 신도가란 인물은 죄지어 발뒤꿈치 잘린 전과자다. ‘백혼무인=도’라는 스승 밑에서 정자산이란 재상과 동문수학 중인데, 전과자를 깔보는 정자산을 한 수 위의 내공으로 감복시키는 깨달은 자이다. 신도가의 말이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형해의 안에서 노니는 줄 알았는데, 그대는 나를 오히려 형해의 밖에서 찾고 있단 말인가?”

‘형해의 안’이란 형체 없는 도의 영역이고 ‘형해의 밖’은 혼탁한 현행 위계질서의 세계다. ‘형해의 안=도=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도대체 전과자란 게 무엇이고 재상이란 게 다 무어란 말이냐 묻는 평등주의가, 신도가의 입을 빌려 장자가 하는 비판이다. 전쟁이 그칠 날 없는 무법한 시대에는 그저 운이 좋으면 재상이 되고 운 나쁘면 전과자가 되는 법이니, 전과자를 업신여기는 재상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도가의 도를 도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신도가는 일신의 고난을 수행으로 넘어 자신을 스스로 치유하였으나 정자산은 권력과 공명에 취해 자신을 병들게 하였다. 신도가는 나에게 묻는 사람이고 정자산은 너에게 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오만하게 장애인 전과자를 나무라다가도 도리어 설복당해 부끄러움 가운데 물러서게 된다.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에도 나를 돌아볼 줄 아는 부끄러움의 발견이 필요하다. 윤동주의 ‘서시’는 학생들이 변함없이 좋아하는 작품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나라 잃은 시대에 태어나 생존과 자존은 물론 이름까지 빼앗겨 가며, 스물다섯 윤동주는 이런 시를 썼다. 시의 화자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삶을 소망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 때면 고개 숙여 괴로워한다. 사회 지도층도 등단 문인도 아닌 무명 시인의 내면 기록이라는 점은 거듭 강조해도 부족하다. 이 어렵고 오랜 성찰 끝에 젊은 그는 사랑하는 싸움, 싸우는 사랑의 길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다 안타깝게 쓰러졌다.

그는, 나에게 묻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이것이 1941년의 젊은 시인보다 두 배는 더 나이를 먹은 내가 이 시 앞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이유다. 그리고 여든 해가 지나서도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여전히 이 시를 즐겨 읽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범부에 불과한 나도 너에게 묻는 사람에서 나에게 묻는 사람으로 조금씩은 변해 가고 싶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교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서정성과 불온함이 공존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집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등을 냈다.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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