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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죽음을 슬퍼하지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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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호 22면

[시로 읽는 세상] 어느 공직자의 죽음

시는 죽음을 어떻게 슬퍼할까.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기보다 감추면서 전달하는 글이 시라고 알아왔다. 죽음에 대해서라면 슬픔을 절제하거나 방법적으로 그치는 글이 시라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의 어떤 영결식에서 혼자 큰 소리로 우는 한 시인을 보고선 이 생각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두가 힘써 울음을 참고 있는 중에 그이의 울음소리는 도드라졌다.

비통히 우는 애도가 ‘공무도하가’ #참고 견디는 손택수의 ‘담양에서’ #죄의식에 신음, 김종삼의 ‘민간인’ #작품에서 다양하게 표현된 슬픔 #사과 안 남긴 아쉬운 선택 앞에는 #이 중 어느 것도 꺼내놓기 어려워

슬픔은 그렇게 드러내는 것이 맞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울음의 참음에 꼭 울음보다 더 큰 슬픔이 들어 있다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참는 슬픔이 약한 슬픔은 아닐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울음으로도 침묵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죽음을 두고 쓰인 시들을 찾아 읽으면서, 대체로 이 두 슬픔이 작품들에 고루 들어 있고, 더 복잡한 맥락에서 죽음을 다룬 작품도 많음을 알게 되었다. 비통히 우는 슬픔의 예로 오래된 ‘공무도하가’가 있다. 한역되었다가 다시 국문으로 번역된 상대 시가다.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그예 물을 건너시네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가신 임을 어이할꼬

어느 늙은이가 물에 뛰어들고 그 아내인 듯한 이가 부르며 만류하다 주저앉는 모습을 내용의 뼈대로 하고 있다. ‘물’은 생사의 간격이자 삼도천이나 레테강과 같은 저승길의 상징에 가깝다. 이 짧은 넉 줄을 채운 화자의 슬픔을 ‘돌아가시니’와 ‘어이할꼬’로 다시 줄여 놓고 보면, 절로 장탄식이 난다.

우는 슬픔은 애도가(Elegy)들의 바탕에 깔려 있고, 죽음이 삶에 뚫은 구멍 앞에서 전율하는 시들은 예부터 많지만, 산 자는 또 계속 살아야 한다. 슬픔은 수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손택수의 ‘담양에서’는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차분히 새기는 시이다.

 아버지 뼈를 뿌린 강물이
 어여 건너가라고
 꽝꽝 얼어붙었습니다
 그 옛날 젊으나 젊은
 당신의 등에 업혀 건너던
 냇물입니다

아비의 몸을 받아 세상에 나온 자식은 어느 땐가 그 뜨거웠던 몸을 제 가슴에 모셔야 한다. 그리고는 또 살려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 그를 위해 아버지는 저렇게 기적을 마련해 놓았다. 아들은 강둑에 엎드려 절하고, 물 위를 안전히 걸을 것이다. 이런 시에서 죽음은 삶의 품에 삶은 죽음의 품에 깃들고, 슬픔은 참고 견딜 만한 것으로 어렵사리 가라앉는다. 이들과는 빛깔이 사뭇 다른, 더 심각한 시편들도 있다. 이들은 죽음보다 ‘죽임’에 연루된 인간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가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의 유명한 ‘민간인’이다. 그의 월남 사실을 대입해 읽는 게 무난할 것이다. 긴장된 밀항 중에 울음을 터뜨린 젖먹이를 다른 이들이 바다에 던졌다. 살려고 엉겁결에 이 짓을 한 무리 중에 스물일곱 시인도 타고 있었다(고 읽고 싶다). 시의 앞부분은 전보처럼 더듬거린다. 힘을 다 짜내어 말하는 것이다. 이걸 시로 적을 수 있기까지 그에겐 장장 ‘스무 몇 해’가 필요했다. 그런 짓을 하고도 삶은 가능한 건지, 그 세월에 무수히 물었을 것이다.

시는 이상한 비문으로 끝난다. ‘누구나’는 긍정의 서술어를 원하는데 여기선 ‘모른다’가 그 자리에 나와 있다. 젖먹이의 죽음은 죄의식의 심연이고 파괴된 윤리의 무덤이다. 삶은 ‘안다’고 말하고 싶은데 화자의 시적 무의식은 끝내 ‘모른다’고 말해 버린다. 그는 그 비극의 깊이를 모르므로 고통과 가책의 ‘수심’에서 헤어날 수 없다. 비틀어서 모호한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정신없는 신음이 되는 것 같다. 이 죄의식이 극도로 격화되는 지점에서 어쩌면 자살이라는 사건이 발생할 것이다.

시도 늘 자살을 슬퍼해 왔다. 저 ‘공무도하가’의 시인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모든 자살을 차별 없이 슬퍼하진 못할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를 빌려 우회해 볼까. 이 작품들은 이십 년 동안 자살을 참아 낸 사람의 이야기다. 모르고 아비를 죽이고 모르고 어미와 혼인한 자는, 제 삶이 운명의 장난임을 또한 모르면서, 열과 성을 다해 나라의 암운을 걷어 내려 애쓴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무덤을 파고 거기 들어가 묻히는 자이다. 오이디푸스는 시시각각 밀려오는 두려움을 과감히 이겨 내며, 진실의 가공할 만한 힘에 정열적으로 굴복해 가는, 비극의 전형적 인물이다.

밝혀진 진실 앞에서 절망한 그는 무덤을 파듯 제 두 눈을 찌른다. 그가 스스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장님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남은 생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었고, 그걸 거부할 힘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작품들 곳곳에서 죽음을 갈망하는 자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그는 추방된 자이자 더는 인간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되어,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무려 이십 년을 구걸하며 떠돈다. 그리고 신의 벌이 다한 무렵에 또한 신의 뜻으로 ‘고통 없이 편안하게’, ‘축복 속에’ 숨을 거둔다.

지난달에 어느 고위 공직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을 타자화하여 살해했다. 살인자와 피살자가 한 몸인 이 죽음을 법으로 추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만큼 그가, 죽음의 연유가 된 피해자에게 아무런 사과도 해명도 남기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하다. 이 죽음의 근본 원인이 피해자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모두가 오이디푸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는 슬픔과 참는 슬픔과 신음하는 슬픔 중 어느 것도, 여기에는 꺼내 놓기 어렵다. 시는, 이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기가 참 어렵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교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서정성과 불온함이 공존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집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등을 냈다.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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