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송두율과 윤이상의 차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송두율을 보고 윤이상을 생각한다. 1967년 서베를린 슈판다우에 사는 윤이상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포위망이 좁혀들고 있을 때 그의 집에서 인터뷰를 했다. 동백림사건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턱이 없었다.

식사하고, 인터뷰하고, 차를 마시는 동안 윤이상은 한국에서 온 젊은 기자에게 국가를 위해 일을 많이 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리고 자주 한숨을 토해냈다. 그의 한숨은 고국에 대한 향수 탓이려니 했다. 그가 현대음악의 거장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찍은 사진도 빌렸다.

그러나 인터뷰 기사를 쓰기 전에 동백림사건이 터져버렸다. 서울로 압송된 윤이상은 1967년 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2년 뒤 형 집행정지 처분으로 풀려나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에 그에게서 빌린 사진을 잃어버렸다.

사진을 돌려주지 못한 데 대해 그에게 사과할 기회가 온 것은 1980년 마드리드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총회에서다. 윤이상은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한민통) 공동대표로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사진 잃어버린 얘기를 하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고는 다른 나라 대표들이 있는 데로 총총히 사라졌다.

독일 통일 직후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눈에 띈 것이 그의 서재 책상 위에 놓인 외아들 부부의 사진이었다. 그는 무용을 하는 북한 여성을 며느리로 맞았다. 윤이상은 자신의 귀국 조건으로 한국정부가 자신에게 가한 가혹행위에 공식으로 사과하고 비무장지대에서 통일음악회를 열게 하라고 요구했다.

윤이상은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자로 자처했다. 그랬을 것이다. 세계적인 작곡가로 명성을 얻고 거기 따르는 안락한 생활을 확보한 그에게 공산주의는 인연이 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의 친북활동은 1984년 평양에 '윤이상 음악연구소' 설립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애당초 서독의 유학생들과 교민들을 북한 공작원들에게 소개해 동백림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다.

친북활동을 하고 '공작금'성격의 돈을 받은 점에서 송두율은 윤이상의 재판(再版) 같다. 그러나 윤이상은 노동당에 입당하라는 북한의 권유를 뿌리쳤다. 자신이 '경계인'이라는 아리송한 말도 하지 않았다. 북한을 북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평가하자는 '내재적 논리'라는 것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윤이상은 당당하게 친북활동을 하다가 끝내 귀국의 기회를 놓치고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철학자 송두율의 처신은 대조적이다. 처음에는 자기가 북한 지도부 서열 23위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김철수가 맞지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활동한 바 없다고 말을 바꿨다.

그는 한국의 이름있는 학자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북한에 무형의 힘이 되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북한에서 받은 수만달러는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김일성 사망 때 김정일의 손을 잡고 울먹이는 모습의 사진은 무엇을 말하는가.

'장군님'에 대한 충성맹세의 글은 또 뭔가. 그가 노동당에 입당한 1973년은 미국이 베트남을 포기한 해다. 미국의 베트남 철수는 김일성의 적화통일의 꿈에 부채질을 하고, 한국은 극도의 안보 위기감에 휩싸였다. 경제도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백94달러 대 3백40달러로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다. 기회주의자들이 북한에 접근할 만한 조건들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뒤에는 한국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송두율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모든 걸 훌훌 털고 국민과 사법당국의 처분을 겸허하게 기다리라는 중론에 따르는 것이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매료된 그가 세(勢) 불리하다고 독일 대사관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너무 초라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를 포용해야 한다. 그도 역사의 희생자다. 그러나 철저한 수사와 과거의 행적에 대한 솔직한 사죄의 과정은 생략할 수 없다. 송두율 문제로 독일과 외교마찰을 빚는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송두율 문제에 대한 시비가 색깔론이라는 것은 더욱 어불성설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