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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의학계 10대 뉴스]

중앙일보

입력

질병 퇴치에서 생명의 복제까지. 20세기는 불가능의 신화에 도전한 현대의학의 개화기였다. 중앙일보는 서울대의대 의사학과 황상익교수 등 9명의 교수와 함께 지난 세기 의학사를 빛낸 10대 사건을 선정해 과거를 재조명하고 의학의 미래를 전망해본다.

20세기 의학의 최대 업적은 각종 질병의 퇴치로 무병장수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1928년 9월3일은 이런 의미에서 의학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날로 손꼽힌다.한달동안 휴가를 다녀온 영국의 미생물학자 플레밍은 푸른곰팡이로 오염된 배지에서 유독 세균이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사상최초로 세균을 죽일 수 있는 항생제 페니실린이 탄생한 순간이다.페니실린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메던 영국수상 처칠은 물론 2차세계대전 당시 부상병들의 생명을 거뜬히 구해 연합국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페니실린 이후 결핵약 스트렙토마이신 등 수십여종의 항생제가 봇물 터지듯 등장했다.수천년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역질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류와 결별한 질병도 있다.1993년 세계보건기구는 20세기초 인류 최대의 사망원인이었던 천연두가 박멸됐다고 공식선포했다.

1941년 미국의사 파파니콜라우는 면봉을 질에 넣어 자궁경부의 세포를 긁어내 현미경으로 암세포가 있는지 살펴보는 질세포진 검사를 고안했다.

사상최초의 암 조기진단법인 셈이다. 암의 완전 정복은 아직 숙제로 남아있지만 적어도 일찍 발견하면 완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질세포진 검사의 등장은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이후 폐암 등 몇가지 암을 제외한 대부분의 암을 효과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조기진단법이 등장했다.

1954년 미국하버드의대 머레이교수는 사상최초로 콩팥이식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 67년 남아공의 버나드박사가 심장이식술에, 미국의 스타즐박사가 간이식술에 성공해 장기이식술 시대를 열었다. 현재 안구와 뇌 ·위장을 제외한 모든 장기의 이식이 가능하다.

1972년 영국의 공학자 하운스필드는 칼로 배를 열지 않고 인체 내부를 이잡듯 촬영할 수 있는 CT(전산화단층촬영장치) 를 개발했다.

79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그는 역대 노벨의학상 수상자중 유일한 공학자다. 그러나 CT의 등장은 그동안 내과의사들의 경험에 의존해온 질병의 진단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역대 어떤 노벨의학상 수상자보다 인류건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 1백년은 화려한 성공 못지 않게 새로운 질병이 인류를 위협하기도 했다. 1956년 일본 큐수의 작은 어촌인 미나마타에 괴질이 발생했다.

걸음이 이상해지고 손발이 마비되며 눈이 안보이다가 사망했다. 화학비료공장의 폐수에 섞인 수은이 원인이었다.2천여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해 9백여명이 사망했다.

환경공해가 집단적으로 질병을 일으킨 최초의 사례였다. 96년 성비파괴 등 생태계 교란으로 논란을 빚은 환경호르몬 파동까지 숱하게 많은 공해로 인한 건강피해가 보고됐다.

81년 미국 LA의 동성연애자에서 처음 발견된 에이즈는 자만심에 부푼 인류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지금까지 2천1백만명이 에이즈로 숨졌으며 현재 3천6백만명이 에이즈 감염자다.

에이즈뿐 아니라 96년 영국의 광우병과 일본의 병원성대장균 O157, 97년 홍콩의 조류독감 등 신종 전염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바이러스뿐 아니라 세균도 창궐했다.

96년 일본에서 최강의 항생제로 불리우는 반코마이신에도 죽지 않는 슈퍼박테리아가 처음 등장했으며 98년 한국에서도 나타났다. 항생제 남용에 의한 세균 내성이 원인이었다.

20세기 의학의 최대 화두인 ‘유전자’는 인간에 대한 겸허한 이해를 촉구했다.

바이러스에서 인간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이란 4가지 염기의 조합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1953년 영국 캠브리지대 연구원이었던 햇병아리 과학자 왓슨(당시 25세) 의 머릿 속을 스쳐간 영감이 20세기를 풍미한 유전자 혁명의 발단이다.

그는 유전자를 구성하는 DNA가 이중나선구조임을 밝혀냈다.인간의 경우 모두 30억쌍의 염기가 이중나선의 가닥 속에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늘어서 있다.

생물학사상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그의 발견이 있은지 반세기도 되기 전인 2000년6월 미국 클린턴대통령과 영국 블레어수상은 30억쌍의 조합을 모두 밝힌 인체지놈사업의 완성을 공동 발표했다.만물의 영장이란 수식어에 걸맞지 않게 인간의 염기서열은 원숭이와 99% 일치하며 쥐와도 90% 일치했다.

21세기 의학의 최대 과제는 윤리와의 조화다.51년 경구피임약 에노비드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52년 성전환수술 성공과 78년 시험관 아기탄생,88년 먹는 낙태약 RU486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성 개방의 포문을 열었다.‘생식 목적 이외의 쾌락을 위한 성은 죄악’이란 톨스토이의 주장은 빛바랜 구호로 전락했다.

환자의 권리 의식도 높아졌다.71년 핀란드에서 사상 최초로 뇌사를 인정한 법안이 마련됐다.76년 미국뉴저지주 대법원은 약물복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미국여성 퀸란에게 인공호흡기를 떼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다.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가 처음으로 법적인 인정을 받은 사례다.급기야 2000년 네덜란드는 독물과 기계를 사용한 적극적 의미의 안락사까지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97년 영국 윌무트박사가 탄생시킨 복제양 돌리는 생명의 본질을 뒤바꾼 전기를 마련했다.

엄마 양의 유방세포에서 체세포 복제를 통해 태어난 돌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생명의 창조방식인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98년 쥐와 2000년 돼지 등 이미 5종류의 동물이 체세포 복제를 통해 태어났다.인간도 마음만 먹으면 머리카락의 모근세포나 살점 하나만으로도 자신과 유전적으로 1백% 닮은 후손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생명윤리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선 과학의 대중화가 긴요하다.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에게 파문을 명하려 했던 재판관의 무지를 반복해선 안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첨단의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심은 곤란하다.

인공호흡기를 떼면 누구나 죽을 것으로 예상했던 퀸란도 무려 9년을 더 살다가 85년 사망했다.게다가 몸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현대의학이 마음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혜걸 기자 ·의사

◇1백년 의학사의 10대사건을 선정하고 도움말을 주신 분:여의도성모병원 홍영선,삼성제일병원 한인권,서울대보건대학원 김록호, 서울대의대 김창엽 ·이윤성 ·황상익, 서울중앙병원 김영식 ·송규영, 연세대의대 노성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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