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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보는 아이사랑] 2. 아이 친구도 내 자식

중앙일보

입력

화세(9.중산초등4) 의 같은 반 친구 혜지.희연.윤선이는 오늘 화세네 집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직행하느라 함께 놀 시간도 없었지만 오늘은 실컷 병원놀이도 하며 밤새 수다를 떨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선 화세 엄마와 함께 아침체조를 하고 도넛을 만들어 먹을 계획이다.

임행옥(40.경기도 고양시 일산동) 씨가 방학을 맞아 딸 화세의 반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 임씨는 지난 여름 아이의 방학숙제를 위해 처음 해 본 '친구집에서 잠자기' 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이번 겨울방학엔 자청해서 시작했다.

우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임씨 자신이 딸에 대해 새로 발견하고 느낀 점이 많았던 것. 여러 아이들 가운데 있는 화세는 자신이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또 화세 친구들의 성격과 장단점, 내 아이와 다른 점들까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이들 간식과 식사 준비, 집 청소 등 귀찮은 점이 많아요. 하지만 아이들이 다른 집의 분위기를 익히고 예절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라는 임씨는 다음엔 친구 혜지네 집에서 화세가 잘 계획이라고 덧붙인다.

역시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둔 김은주(35.경기도 분당구 서현동) 씨도 아들 승훈이를 친구 영지네 집에 보낼 예정. 김씨는 아들에게 친구 부모님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과 식사 전후에 감사인사를 할 것 등을 미리 일러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이순형 교수는 "이러한 '친구 집에서 잠자기' 는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자지교(易子之敎) 의 풍습과 맥을 같이한다" 고 설명한다.

'역자지교' 는 귀한 자녀를 남의 집에 살도록 하면서 예절을 익히고 나와 다른 남을 수용할 수 있는 품성을 키우는 풍습. 형제 없이 혼자 자라 이기적이기 쉬운 아이들에게 남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전통으로 꼽힌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지만 자녀 수가 적은 요즘 엄마들의 자식사랑은 유별나다.

행여 남들에게 뒤처질까 영재 교육에 골몰하며, 기라도 죽을까 아이가 원하는 것은 뭐든 사준다.

동네 어른들이 내 아이를 야단치거나 학교에서 선생님께 벌을 받으면 아이 편부터 드는 게 요즘 부모들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어긋난 아이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남을 배려하고 남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회적 부적응을 겪을 수 있으며, 원칙없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만 하면 자제력과 인내심을 배울 기회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는 것.

한국가족문화연구소 나원형 소장은 "최근엔 학교마저 우정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를 학습하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며 "아이들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부모들의 생활방식이므로 부모들이 먼저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고 강조한다.

경기도 광명시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부 홍성미(38) 씨. 홍씨는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와 아이 친구 3명을 모아 일명 '품앗이 과외' 를 한다.

국어.수학.영어 과목을 부모들이 돌아가면서 가르치는 단순한 공부모임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네 가족이 모두 친해져 남편들까지도 죽마고우 이상으로 어울린다. 급한 일이 있을 때 아이를 맡아주기도 하고 경조사에도 발 벗고 나서는 사이가 됐다.

홍씨는 "아파트 생활이 삭막하다고 하지만 내 자식 네 자식 구별 없을 만큼 친한 이웃들이 늘어나고 보니 생활수준이 비슷하고 공간이 밀집돼 있는 아파트는 인간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조라는 생각이 든다" 고 말했다.

그는 또 "의도적으로 낯이 익은 이웃끼리 먼저 인사하고 안부를 묻곤 하니 자연히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습관을 익히게 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양보하고 배려한다" 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제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주변의 어려운 아이들에게까지 넓힐 예정. 부모들이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을 익히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아이들이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버릇 없어지는 것은 어른들의 탓이 크다" 는 홍씨는 "어른들 스스로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대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아이에게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도록 하고 싶다" 고 말했다.

박혜민 기자
사진=신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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