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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훈 칼럼니스트의 눈

오웰의 『1984 』로 보는 코로나 시대의 위험과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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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코로나와 빅브라더, 양극화

1984 영화 이미지 [Imdb]

1984 영화 이미지 [Imdb]

2016년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 고전 소설 하나가 새삼 주목받게 되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1984』. 소설 『1984』에는 ‘진리부’라는 생소한 정부 부서가 등장한다. 이 부서는 토론과 대화를 억누르고 권력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 하도록 시민들을 감시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 끝내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무너지고 시민들은 이중 의식에 시달린다. 트럼프식 탈진실 정치와 의식 분열의 시대를 조지 오웰은 수십 년 앞서 예측·상상하였던 셈이다.

오웰이 상상했던 텔레스크린은 스마트폰 앱, CCTV 등을 통해 현실화돼 #하층민 ‘프롤’의 세계와 2020년 사회적 약자 ‘프레카리아트’는 닮은꼴 #코로나19가 촉발하는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방역 성공신화에 가려져 #그래도 희망적인 건 국가와 시민이 상호 감시와 자율의 줄을 놓지 않은 것

코로나에 갇힌 채 『1984』를 다시 꺼내 읽으면서 필자는, 조지 오웰은 트럼프보다도 코로나 위기 시대를 상상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2020년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면서 곳곳에서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 빅브라더 국가의 등장이다. 소설 『1984』를 펼치면 모든 삶을 감시하는 빅브라더라는 존재가 1부 1장에서부터 등장한다.

『1984』와 2020년의 세계의 닮은 점은 또 있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은 자신의 행동·의식·감정을 감시하는 빅브라더 국가에 저항하면서 잃어버린 자유와 개성을 되찾을 꿈을 꾼다. 코로나 공포 속에서 빅브라더의 등장과 개인 프라이버시의 침식을 걱정하는 우리 모두는 어쩌면 2020년의 윈스턴이 아닐까?

오늘 여러분들과 오웰 테스트를 해보자. 오웰이 상상했던 디스토피아의 양상들은 코로나 전쟁 속에서 어디서 얼마만큼 현실화하고 있는가? 테스트 결과부터 밝히자면 ①이미 알려진 대로 비서구 권위주의 국가들은 오웰이 그려놓은 『1984』의 빅브라더 국가를 닮아가고 있다. ②현대 자유주의의 보루, 미국에서 빅브라더는 국가가 아니다. 구글·페이스북 같은 데이터 기업들이 빅브라더다. 코로나가 드러낸 미국의 위기는 오웰이 상상하던 또 다른 위험, 즉 두 개의 계급으로 분리된 양극화 사회의 문제다. ③마지막으로 한국. 한국이 코로나 전쟁 중 세계의 주목을 끄는 까닭은 코로나를 세밀히 감시·추적·치료하는 돌봄 국가와 시민들의 자유가 끈질긴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끝내 오웰의 예언을 무력화시킨다면, 새로운 한국모델이 탄생하는 셈이다.

코로나와 빅브라더 국가

오웰 테스트의 첫 관문은 이른바 ‘텔레스크린’이다. TV가 널리 보급되기도 전인 1949년에 오웰은 모든 가정의 거실마다 놓여 있는 텔레스크린을 개념화하였다. “텔레스크린은 방 전체를 조명할 수 있도록 벽 한쪽 끝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스크린은 모든 가정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뿐 아니라, 불온한 시민들의 빨라지는 심박 수까지도 알아차린다.

오웰이 상상하였던 텔레스크린은 오늘날 스마트폰과 앱, 인공지능 스피커, CCTV를 통해서 현실화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맞은 2020년의 세계에서 텔레스크린은 세 갈래로 분화중이다.

①국가가 시민들의 동선·체온·심박수를 스마트폰 앱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모든 시민을 윈스턴으로 취급하는 비서구 감시 권위주의 국가들이 있다. ②한편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주의 국가의 시민들이라고 디지털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서구 자유주의 선진국 시민들은 손목에 차고 있는 스마트 워치를 통해서 심박 수, 체온, 지난 밤 숙면 여부를 자발적으로 테크 기업들에 바친다. (게다가 무료로!) 또 ‘기분이 좋아요’ ‘우울해요’를 누름으로써 페이스북에 그날그날의 감정 상태를 보고한다. 서구 자유주의의 텔레스크린은 공권력이 아니라 데이터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다.

③앞의 유형들과 달리, 한국 사회의 텔레스크린은 쌍방향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 정부와 지자체들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 확진자·접촉자·해외 유입자들의 동선을 모니터링하고 건강 상태를 체크함으로써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통제한다.

한국사회가 독특한 것은 시민들 역시 스마트폰으로 정부와 지자체·질병관리본부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니터링한다는 점이다. 각급 학교의 등교 결정, 대규모 집회 허용 결정, 휴업, 휴관 중인 시설 등을 시민들은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다. 정부 결정이 잠시라도 느슨해질라치면 온라인 게시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정부의 빠른 대응을 촉구하는 댓글들이 넘쳐난다. 한국의 텔레스크린은 정부와 시민 양쪽에서 통제하는 양면 스크린이다.

코로나 위기와 오웰의 양극화 예언

코로나와 싸우는 시대, 오웰의 두 번째 테스트는 생활세계의 양극화다. 『1984』에서 묘사되는 양극화는 이른바 당원과 프롤(프롤레타리아를 줄인 오웰의 신조어) 사이에 벌어진 돌이킬 수 없는 격차다. 당원들은 주인공 윈스턴처럼 일상생활을 감시당하고 통제받기는 하지만,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을 하며 그럭저럭 살만한 주택과 먹거리를 제공받는다. 하지만 『1984』속의 하층민 프롤의 세계는 2020년의 약자들인 프레카리아트(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노동 계급)의 삶과 닮았다. “그들은 열두 살부터 일하기 시작하고…. 서른 살에 중년이 되며 대부분 예순 살에 죽었다. 머릿속은 고된 육체노동, 가사와 자녀양육,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영화, 축구, 맥주 그리고 도박 따위로 가득했다.”

2020년 세계를 덮친 코로나바이러스는 누구에게나 공포지만, 그 공포는 양극화된 공포다. 먼저 코로나 위기가 발가벗기는 미국 사회의 분리된 생활세계를 들여다보자. 100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10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의 코로나 위기는 미국사회를 뿌리부터 흔드는 양극화를 고발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도가니로 추락했던 뉴욕시를 기준으로 보자면, 확진자의 약 40%는 흑인(21%)과 라틴계(17%) 소수인종이었다. 인구 비율을 감안한다면, 이들 소수 인종의 코로나바이러스 위험도는 백인들보다 적어도 수백 퍼센트 높다.

코로나 위기가 촉발하는 한국사회의 양극화는 성공적 방역이라는 신화 속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성공의 무대 뒤에 가려져 있는 현실은 예리하게 절단되어 있다. 절단면의 위쪽에는 공무원·대기업·정규직들의 안전한 삶의 세계가 있다. 이들의 일터는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자, 재빨리 비대면 근무로 전환하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갑작스런 재택 근무, 비대면 근무에 따른 불평들을 늘어놓지만 이들이 당장 직장을 잃지는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될 위험도 상대적으로 작다.

절단면 반대편에 2020년 한국판 프롤의 세계가 있다. 삶을 이어가기 위해 오토바이·트럭 등으로 끊임없이 배송해야 하는 긱(gig) 노동자들이 있다. 하루 수백 개의 배송지를 뛰어다닐 때 이들이 의지할 것은 마스크 한 장뿐이다.

오웰의 『1984』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오웰의 음울한 상상을 넘어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까닭은 국가와 시민들이 팽팽히 맞서면서 감시와 자율의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줄다리기가 K-방역을 넘어 K-상생으로 이어질 때, 한국은 코로나 이후 시대 지구촌 희망의 횃불이 될 수 있다.

시민들의 협력적 역량이 방역의 성공요인

최근 사회과학자들은 코로나 대응을 좌우하는 사회 정치적 요인들을 가려내느라 분주하다. 가장 단순한 주장은 그림처럼 효과적인 코로나 대응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긍정적 영향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일본이라는 예외 사례를 제외하면, 사민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나라일수록 인구 1000명 당 확진자 숫자가 작다는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하는 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 사례가 가리키듯이.

인구 1000명당 확진자 수

인구 1000명당 확진자 수

좀 더 정교한 연구들은 체제의 성격과 같은 거시적인 요인들보다는 학교 폐쇄, 공공 모임 정지, 코로나 방역수칙 캠페인, 국내 여행 제한과 같은 정책적 요소들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달리 말해, 정부의 정책과 시민들의 협력적 역량이 성공적 방역의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입증하는 셈이다.

장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