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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 수사검사 자른 트럼프, '토요일 밤 대학살' 기억 되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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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하던 제프리 버먼 뉴욕남부지검장이 해임된 사건은 1973년 리차드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수사하던 특별검사가 해임된 '토요일 밤의 대학살'의 닮은꼴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제프리 버먼 미 뉴욕 남부지검장이 지난 20일(현지시간) 사무실 앞에 서 있는 모습. 버먼 지검장은 이날 해임됐다. [AP=연합뉴스]

제프리 버먼 미 뉴욕 남부지검장이 지난 20일(현지시간) 사무실 앞에 서 있는 모습. 버먼 지검장은 이날 해임됐다. [AP=연합뉴스]

21일(현지시간) CNN,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트럼프가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검사를 해임한 것은 닉슨의 '토요일 밤의 대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사법 독립성을 침해하고 법치주의를 무력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측근 수사하던 버먼 검사장에 해임 통보 #워터게이트 당시 '토요일밤의 학살'에 비유 #미 하원, 버먼에 청문회 증언 요청

미 언론 "정치적 셈법에 법치 훼손" 비판 

1973년 10월 20일,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수사하던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전격 해임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분수령이 된 '토요일 밤의 대학살'이다.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부 장관은 '콕스 해임안'을 거부하고 사임했고, 윌리엄 란케르즈하우스 법무부 차관도 뒤를 따랐다. 결국 닉슨은 송무 차관을 직무대행으로 임명해 특검 해임을 강행했다.

닉슨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내몰려 중도 사퇴하게 된 건 워터게이트 호텔에 사무실을 뒀던 '민주당 전국위원회'를 도청한 본안 사건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정권 핵심부로 좁혀져 오던 수사를 막으려 특검을 해임한 사법방해 혐의가 결정타였다. 이 일로 완전히 민심을 잃은 닉슨은 이듬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하면서 고별 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하면서 고별 연설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트럼프에 비판적인 언론들은 트럼프가 닉슨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분석한다. 버먼이 수장을 맡은 뉴욕 남부지검은 미국 법무부 산하 93개 연방 지검 중 가장 권위 있고 독립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민감한 월가의 금융사건, 정치 비리 사건, 테러 사건을 관할한다. 2018년 버먼 부임 이후 뉴욕남부지검은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을 기소해 유죄 판결을 받아냈다. 트럼프의 성 추문과 관련된 여성 2명에 입막음용으로 돈을 주고 의회에서 위증했다는 혐의였다.

트럼프의 측근이자 개인 변호사인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도 조사 중이다. 줄리아니는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핵심 인물로 꼽힌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비리 의혹 조사를 압박했다는 의혹이다. 수사 결과에 따라 트럼프를 탄핵 위기로 몰았던 의혹이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점화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에게 버먼은 여러모로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버먼이 터키 국영은행이 대 이란 제재를 위반한 혐의를 수사한 것도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이 사건을 무마시켜달라고 요청하자 “오바마가 임명한 검사들이 교체돼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 언론들은 트럼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가뜩이나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비리 사건으로 추가 타격을 입을 경우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트럼프가 버먼의 후임으로 제이 클레이튼 미 증권거래위원회(이하 SEC) 위원장을 지명한 것이 이 같은 분석에 힘을 싣는다. 제이 위원장은 검사 경력이 없다. 뉴욕타임스는 후임으로 지목된 클레이든 위원장은 평소 트럼프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사이이며, 지난주 주말 트럼프 대통령 소유 골프장에서 함께 골프를 즐겼다고 전했다

"그때와 다른 건 법무부 장관의 처신"

바 장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높다. 리처드슨 장관은 닉슨 대통령의 콕스 특검 해임 지시에 소신대로 행동했다. 리처드슨 장관은 닉슨 대통령의 해임 지시가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미 행정부의 장관들이 ‘세크러터리(Secretary)’로 불리는 것과 달리 법무부 장관 직함은 ‘어토니 제너럴(Attorney General)’로 불리는 이유를 몸소 증명했다고 평가받는다.

윌리엄 바 미국 법무부 장관 [로이터]

윌리엄 바 미국 법무부 장관 [로이터]

반면 바 장관이 보인 일련의 행보는 대통령의 개인 비서 또는 변호사처럼 처신해 법치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바 장관은 트럼프의 지시에 따라 19일 버먼 교체 방침을 밝히는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버먼이 이를 거부하자, 20일 버먼에게 서한을 보내 "당신이 물러날 의사가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오늘부로 대통령에게 해임을 요청했고, 대통령이 받아들였다"며 해고를 통보했다.

제럴드 내들러 미국 하원 법사위원장은 21일 CNN에 출연해 바 장관이 탄핵감이지만 이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바가 탄핵을 당할 만하지만 상원을 공화당이 주도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를 추진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것이라고 봤다. 그는 "바 장관이 (트럼프 측근 비리) 수사를 방해하는 패턴을 봐 왔다. 버먼의 해임도 수사 방해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하원 법사위는 버먼이 청문회에 나와 증언하라고 요청한 상태다.

정유진 기자 jung.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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