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북한의 군사합의 파기 당당하게 맞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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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한이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16일 폭파한 데 이어 어제 9·19 남북 군사합의를 깨겠다고 선언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지구 및 비무장지대(DMZ)에 군부대를 재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서해에서의 군사훈련을 재개하고 대남 전단을 다시 뿌리기 위한 군사적 조치도 취하겠다고 했다. 이는 2000년 6·15 남북 공동성명 이전의 긴장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협박이다.

‘비례적 대응’ 등 구체적 방안 천명 필요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엔 꼭 책임 물어야

북측의 잘못된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또다시 나서 “철면피” “귀머거리” 같은 온갖 모욕적 표현을 써가며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했다. 나아가 북측은 ‘서울 불바다론’을 소환한 데 이어 우리 정부가 비공개로 특사를 보내겠다고 요청한 사실마저 까발렸다. 이런 행동은 지난 3년간 쌓아온 남북 간 신뢰를 산산조각내는 무책임한 짓이다. 좌충우돌하면 남측이 대북 지원 및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 나서줄 걸로 김정은 정권은 기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착각 중의 착각이다. 지금처럼 평화를 위협하면 할수록 대북 지원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향한 문은 굳게 닫힐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힘쓰겠다는 김정은의 약속이 빈말일 거란 인식이 강해지는 까닭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북한은 엉뚱한 망동을 접고 남쪽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번영은 평화를 먹고 사는 법이다.

우리 정부는 그간 어렵사리 이룩한 평화 프로세스의 기반이 무너질까 봐 겁을 내 북한에 끌려다녀선 안 된다. 1972년 남북 공동성명 이래 본격화된 남북 교류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당당하게 나갈수록 북한이 먼저 대화를 요구해 왔다.

그런 면에서 17일 뒤늦게나마 청와대가 정당한 대응으로 전환한 것은 온당한 일이다. 비록 김여정이 문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기 때문에 방향 전환이 이뤄진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국가원수를 모독하는 걸 방치하는 건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국방부 역시 북측의 군사합의 파기 예고를 두고 “실제 행동에 옮기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건 올바른 대응이었다. 다만 ‘비례적 대응 원칙’ 천명처럼 좀 더 구체적이고 원칙이 분명한 대처 방식을 밝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국민의 신뢰감을 얻는 동시에 북한의 오판을 더 효과적으로 억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북한이 어떤 도발을 감행하든 즉각 응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 대한 책임을 북한에 반드시 물어야 한다. 혈세 170억원 이상이 투입된 남북 화해의 상징을 일방적으로 파괴하고도 무사하다면 향후 남북 교류에 나쁜 선례가 될 것이다. 이번에 그냥 넘어간다면 언젠가 북녘땅에 우리가 철로를 깔아준 뒤에라도 비슷한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한편 이런 움직임과는 별도로 여권과 김연철 통일부 장관의 처신은 자못 실망스럽다. 이 와중에 여당은 4·17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이다. 설혹 비준을 꼭 해야겠다고 해도 지금처럼 북한이 강공에 나설 때 추진하면 마치 공세에 굴복한 것처럼 비칠 게 틀림없다. 또 김 장관도 긴급 상황이 발생한 만큼 물러나더라도 일단 사태를 수습한 뒤에 물러나는 게 책임 있는 공인의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