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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판문점 선언을 폭파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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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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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남북 정상이 판문점 공동선언에 담았던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북한이 16일 폭파했다. 북한 조선중앙방송 등은 이날 오후 5시 뉴스에서 “16일 14시50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북남 공동연락사무소가 비참하게 파괴됐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쓰레기들과 이를 묵인한 자들의 죗값을 깨깨 받아내야 한다는 격노한 민심에 부응하여 북남 사이 모든 통신연락선을 차단해 버린 데 이어 우리 측 해당 부문에서는 개성공업지구에 있던 북남 공동연락사무소를 완전 파괴하는 조치를 실행했다”고 전했다. 앞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13일 “머지않아 쓸모없는 북남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위협한 지 사흘 만에 실행됐다.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나와 김정은 위원장이 8000만 겨레 앞에서 했던 한반도 평화의 약속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고 밝혔음에도 북한이 초유의 폭파에 나서며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향하고 있다.

북한, 남북연락사무소 파괴…김여정 위협 뒤 3일 만 #문 대통령 “8000만 앞 약속 지켜야” 다음날 전격 단행 #청와대 “폭파 유감, 계속 상황 악화시키면 강력 대응”

군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49분쯤 육군 1군단 전방지역에서 대형 폭발음이 들리면서 연기가 일어나는 모습이 관측됐다. 장소는 북한 개성공단 내로 파악됐다. 정부 관계자는 “육군이 감시장비를 통해 공단 안에 있는 4층짜리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완파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이날 오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연 뒤 “강력한 유감을 표명함”이라고 밝혔다. 김유근 NSC 사무처장은 “북측이 상황을 계속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할 경우 우리는 그에 강력히 대응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함”이라며 이같이 알렸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 경제와 금융시장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며 “향후 상황 전개와 국내외 금융시장을 면밀히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 9월 14일 개성공단 안에 문을 연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그해 4·27 판문점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서 “남북은 당국 간 협의를 긴밀히 하고 민간 교류와 협력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해 쌍방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 지역에 설치하기로 한다”고 명문화했던 사항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얼굴) 국무위원장이 이 선언문에 서명했다. 즉 문재인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의 상징인 동시에 북한에선 ‘무오류’인 김 위원장이 보장한 결과였다.

이처럼 최고존엄이 서명했던 합의문 내용을 북한이 ‘폭파’한 것은 한국을 향해 남북관계의 파산을 통보한 것이나 다름없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문재인 정부가 추구해 왔던 한반도 평화와 남북 교류협력의 상징”이라며 “남북관계를 파탄내겠다고 언급해 왔던 북한이 이런 상징적인 장소를 골라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북한의 ‘폭파 시위’는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미 협상이 결렬된 데 따른 책임을 한국에 묻는 것이라는 해석도 많다.

북한 폭파시위…“남측에 제재 이탈해 미국 설득하라는 위협”

“남북관계 파산통보” 분석도
북 “해당 부문서 파괴조치 실행”
북한군 GP에서 인공기 사라져
추가 군사도발 가능성 예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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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북·미 중개에 실패한 만큼 이제 ‘우리민족끼리’로 움직일지, 아니면 ‘대북 압살 전선’에 계속 남아 있을지를 선택하라는 요구다. 후자를 고수할 경우 앞으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보다 더한 조치에 나선다는 게 북한의 예고다. 북한 노동신문이 15일 “끝장을 볼 때까지 연속적인 행동으로 보복할 것”이라고 한 게 이 대목이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제재를 이탈하든지, 미국을 끌고 나오든지 뭐건 하라는 위협”이라며 “이를 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가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이날 오후 5시 조선중앙통신, 조선중앙방송(라디오), 조선중앙TV를 통해 동시에 폭파를 보도했다. 북한 주민은 접할 수 없는 대외 선전매체가 아니라 북한 주민이 접하는 매체를 통해 폭파 사실을 알렸음을 뜻한다. 이는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직접 접했던 주민들을 상대로 ‘정상회담 지우기’에 돌입한 모습이다. 문 대통령은 2018년 9월 방북 당시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평양 시민 15만 명을 상대로 직접 연설하며 남북관계에서 전례 없는 화해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런데 이젠 ‘남한 최고존엄’을 경험하거나 봤던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비참한 폭파’를 알려 세상이 바뀌었음을 분명히 각인시키고 있다는 해석이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박한기 합참의장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보고받은 뒤 바로 합참 지하의 전투통제실로 들어가 상황 관리에 나섰다. 하지만 군은 추가로 경계 강화 지시를 내리진 않았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관련 일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관련 일지

대신 국방부는 폭파 4시간가량 후 “북한이 군사적 도발 행위를 감행한다면 우리 군은 이에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며 “군은 북한군 동향을 24시간 면밀히 감시하면서 확고한 군사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알렸다. 통일부는 폭파 약 51분 뒤인 오후 3시 40분쯤 연락사무소에 대한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북한의 후속 도발이다. 이날 북한군이 비무장지대(DMZ) 안 경계초소(GP)에서 인공기와 최고사령관기를 내리고 있는 게 포착됐다. 북한군 출신 탈북자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북한이 국가를 상징하는 인공기와 김정은 위원장을 나타내는 최고사령관기를 내렸다는 것은 준전시 상태, 도발 준비 단계, 비상체제 가동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북한 매체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의 주체를 ‘우리 측 해당 부문’이라고 발표한 것을 놓곤 북한이 후속 행동을 예고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 전직 외교관은 “군이 아니라 해당 부문으로 표현한 것은 이번 폭파가 김여정이 이야기한 군사적 조치는 아니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며 “예고했던 진짜 군사행동은 아직 남아 있으며, 이번 조치가 끝이 아니라는 취지로 읽힌다”고 말했다. 폭파는 시작일 뿐 북한이 예고한 ‘다음 단계’가 또 있고, 군은 아직 본격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용수·이철재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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