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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지시 거절 못해 후회" 임종헌 재판서 현직판사 작심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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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뉴스1]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뉴스1]

증인:"그렇게 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되고 그렇습니다"
재판장:"잠시만, 다시 답변해주실래요?"
증인:"후회가 되고 그렇습니다"

재판장 "증인,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중요하다"

1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임종헌(61)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 이날 재판에는 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에서 헌법재판소 대응 업무를 맡았던 문성호(45) 부장판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문 부장판사는 재판개입 문건 작성과 2016년 당시 박한철 헌재 소장을 비판한 법률신문 대필기사 작성 등으로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법관 탄핵 명단에 오른 현직 법관이다.

하지만 문 부장판사는 이날 법정에서 검사의 "부당한 지시를 거절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게 못한게 후회가 되고 그렇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이어 "KKSS('까라면 까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라'는 임 전 차장의 건배사)를 아시죠?"라고 묻자 "네"라고 답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고영한 전 대법관(왼쪽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이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뉴스1]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고영한 전 대법관(왼쪽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이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뉴스1]

문성호의 작심 증언들  

이날 문 판사의 답변은 앞서 법정에 나온 다른 전현직 법관들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증언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문 판사는 검사의 계속된 질문에 "(법원행정처가) 무리했다""간담이 서늘했다""(지시를 거부하니 임종헌이) 역정을 냈다"고 했다. 문 판사의 답변에 윤종섭 재판장은 "증인 많이 힘들겠지만 한마디, 한마디 증언해주시는 것이 사건 파악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 전 차장은 재판 중 직접 마이크를 잡고 "저의 사려깊지 못한 행동으로 (대필 관련)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면 뒤늦게나마 사과한다"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재차 강조했다.

"적극적이고 융통성 있는 법관 활용하라"

문 판사는 2014년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결정 이후 헌재의 위상이 강화되자 이를 견제하려던 양승태 대법원의 헌재 대응 업무를 맡았다. 임 전 차장은 2016년 3월 문 판사에게 대법원에 비판적이던 박한철 당시 헌재소장을 비판하는 법률신문 기사 초안 작성을 지시했다. 문 판사는 "임 전 차장에게 '기사를 쓰는 것은 좀 그렇다'고 말하자 역정을 내며 '일단 써오라는 지시를 했다'"고 말했다. 검사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강압적 지시를 했냐"고 묻자 "그렇다"고도 했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의 모습. [중앙포토]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의 모습. [중앙포토]

문 판사는 헌재 파견 판사를 통해 헌재 내부 평의 소식을 받아 보고서를 작성한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대법원의 업무 방식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로 헌재 내부 정보가 외부로 나온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날 검찰에 공개한 행정처 내부 문건에는 '헌재와 관련해선 파견법관을 활용하되 보안을 위해 일부 적극적이며 융통성 있는 법관을 활용하라'고 기재돼 있었다.

문 판사는 임 전 차장이 재판부에 전화해 무엇인가를 요구하며 언성을 높이는 장면도 목격했다는 증언을 했다. 재판 개입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임 전 차장이 직접 반박을 하기도 했다.

문성호 부장판사 증인신문 中

검찰=증인은 피고인(임종헌)이 일선 재판부에 전화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모습이나 재판부가 난색을 표하니 소리 높인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진술했습니다.
문성호=날짜까진 기억 안나는데 대법원 무궁화홀에서 만찬을 하는데 갑자기 전화기를 들고 만찬장을 나가시더라. 저희끼리도 술렁였는데 얼핀 들어보니 대화 내용이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나요.
=화를 내셨고. '당신만 판사냐, 나도 판사다' 이런 말씀을 하셔서 이게 무슨 부탁을 하시려는 건가 싶었습니다.

임종헌 전 차장=당시 증인이 기억하는 피고인의 모습은 술 많이 취한 상태 아니었나요.
=얼굴 빨개졌던 것은 기억납니다.
=피고가 일선의 친한 판사하고 전화하다가 사소한 말 다툼 끝에 후배들 앞에서 볼썽사나운 모습 보인 것 같은데, 그건 모르시죠?
=제가 기억하는 것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2016년 10월 당시 김현웅 법무장관(왼쪽)이 법제사법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과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황찬현 당시 감사원장. [중앙포토]

2016년 10월 당시 김현웅 법무장관(왼쪽)이 법제사법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과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황찬현 당시 감사원장. [중앙포토]

임종헌엔 불리한 진술 

문 판사의 진술이 주목받은 것은, 양승태 대법원 당시 그보다 더 높은 고위직에 있던 법관들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들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현직 법관이 임 전 차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도 이례적이다. 하지만 이런 문 판사의 증언에도 일선 판사들은 다소 상반되는 입장을 보였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한 현직 판사는 "문 판사가 법원행정처를 나온 뒤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내오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방법원에서 근무하는 다른 현직 판사는 "양승태 대법원 당시 문 판사는 지시받은 일을 철저히 수행하던 판사였다"며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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