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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잠룡 기싸움 된 기본소득 논쟁…‘고용보험 기초’ 문심에 잦아들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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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기본소득

21세기 기본소득

“실질적 자유”

지난 3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꺼낸 이 문구는 여권의 대선 주자들 사이에 기본소득을 둘러싼 기싸움을 촉발시켰다. ‘실질적 자유’는 기본소득 관련 논의를 집대성한 책 『21세기 기본소득』(필리프 판 파레이스, 야니크 판데르보호트 저)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보수 진영의 가치를 ‘형식적 자유’라고 깎아내린 뒤 “실질적 자유를 이 당이 어떻게 구현해 내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 김 위원장의 말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실질적 자유를 가장 덜 가진 이에게 그것을 가장 많이 주는 것”이라는 이 책의 구절을 연상시켰다. 정작 김 위원장은 하룻만에 “기본소득을 당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4일 기자간담회)이라며 뒤로 빠졌지만 여권에 옮겨 붙은 불은 계속 타고 있다.

여권 잠룡들 중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이재명 경기지사였다. 이 지사는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무책임하고 정략적인 주장이 기본소득을 망치고 있다”며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그는 “기본소득은 코로나 이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정책”이라며 “증세나 국채발행 없이 소액으로 시작해 연차적으로 늘려가다 국민적 합의가 되면 그때 기본소득용으로 증세하면 될 일”이라고도 했다. 다음 날에도 이 지사는 ‘기본소득에서 기초연금의 데자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노인 기초연금을 구상했지만, 표퓰리즘이라는 비난이 있었고 비난 때문에 망설이는 사이 박근혜 후보에게 선수를 뺏겼다”고 지적했다.

2019년 경기도가 주최한 기본소득 박람회에서 연설하는 이재명 경기지사. 경기도 제공

2019년 경기도가 주최한 기본소득 박람회에서 연설하는 이재명 경기지사. 경기도 제공

기본소득은 성남시장 재직 시절 ‘청년 배당’으로 정책 실험도 했던 이 지사의 대표 정책 브랜드가 돼가고 있다. 이 지사가 최근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상승세인 것도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사실상 견인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서 이 지사의 대응은 “자신의 대표 정책 브랜드를 지키기 위한 응전”(민주당 소속 수도권 의원)이라고 평가됐지만 청와대 기류와 맞선다는 게 문제였다. 3일 김 위원장의 발언 직후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상당한 기간과 시간을 정해 토론을 먼저 하고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 본격적 고민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현재로선 구체적 수준에서 논의하기는 이른 거 같다”고 말했다.

지난 7일부터는 친문(친문재인) 그룹의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이 본격적으로 이 지사와 맞서면서 여권 내 기본소득 전선은 ‘이재명 대 범친문’의 구도로 전개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전국민 고용보험 VS. 전국민 기본소득’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박 시장은 “전국민 기본소득은 24조원으로 실직자와 대기업 정규직에게 똑같이 월 5만원씩 지급하고, 전국민 고용보험은 24조원으로 실직자에게 월 100만원씩 지급한다”며 “무엇이 더 정의로운 일일까요”라고 썼다. 8일에는 김부겸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복지(사회안전망) 없는 기본소득은 본말의 전도”라며 “전국민 고용보험을 비롯한 사회안전망 강화가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10일 오전 박원순 서울시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 사진 페이스북 캡처

10일 오전 박원순 서울시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 사진 페이스북 캡처

이같은 갈등 구도에 선을 분명히 그은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문 대통령은 9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고용보험 혜택을 넓혀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빠르게 해소하고 가입 대상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지금의 위기를 전국민 고용보험시대의 기초를 놓는 계기로 삼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깨겠다”며 한 말이지만 당의 주류는 “어차피 당장 실현이 어려운 기본소득 논의로 소모전을 치르는 것보다 고용보험 확대에 주력하라는 메시지”(수도권 재선 의원)라고 받아들였다. 하루 뒤 박 시장이 올린 ‘전국민 고용보험에 관한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적극 환영합니다’라는 글은 이같은 해석에 힘을 실었다. 박 시장은 201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문 대통령이 밝혔던 기본소득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소개한 뒤 “제 생각도 똑같다”고 썼다. “일률적으로 거의 모든 전국민에게 1인당 얼마씩 이렇게 하는 부분은 재원상 감당하기 어렵고 그런 재원이 있다면 일자리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이 우리 경제를 살리는 근본 대책”이라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의 메시지로 여권 내 기본소득 논란이 진화될지는 미지수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기본소득이 당장 구체적으로 논의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는 의원 다수가 대통령과 같은 생각”이라면서도 “재난지원금을 계기로 국민적 관심이 커진 데다 당내 유력 대선 후보가 최우선 과제로 밀고 있어 갑론을박은 대선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권 도전 선언을 앞두고 다양한 세력을 규합중인 이낙연 의원은 지난 8일 페이스북에 “취지를 이해한다. 찬반의 논의도 환영한다”며 관망에 가까운 입장을 올렸다.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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