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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대화만"→"벗어라"…벗방 BJ 성착취 뒤엔 '악마의 계약'

중앙일보

입력

5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디지털 성범죄 퇴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음. 뉴스1

5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디지털 성범죄 퇴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음. 뉴스1

인터넷 벗방 BJ(Broadcasting Jockey). 온라인 개인방송 플랫폼에서 옷을 벗은 채 방송하는 사람을 뜻한다. 스스로 음란 행위를 하며 시청자를 끌어모은 뒤 ‘팝콘’ 등으로 불리는 유료 아이템을 받아 돈을 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기획사의 속임수와 압박에 넘어가 벗방을 해왔다”며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BJ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최근 이슈화한 텔레그램 메신저 ‘n번방’ 사건과 유사하게 성 착취를 당했다는 주장이다.

팝콘티비 등에서 벗방 BJ로 활동해온 20대 여성 A씨는 소속사인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B씨를 사기와 강요미수 등의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5일 고소했다. 인터넷 벗방 BJ에 대한 성 착취 의혹이 사건으로 불거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중앙일보는 고소장, 기획사와 쓴 계약서, A씨와 B씨의 전화통화 녹취 등을 입수해 그동안 A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봤다.

팝콘TV의 한 벗방. 시청자가 유료 아이템을 많이 보낼수록 수위 높은 행위를 시청할 수 있다. 가령 1개에 100원인 팝콘을 555개 보내면 ‘BJ가 옷을 벗고 전신에 오일을 바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음. 김민중 기자

팝콘TV의 한 벗방. 시청자가 유료 아이템을 많이 보낼수록 수위 높은 행위를 시청할 수 있다. 가령 1개에 100원인 팝콘을 555개 보내면 ‘BJ가 옷을 벗고 전신에 오일을 바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음. 김민중 기자

키스방서 만난 손님 “벗방 어때”

A씨는 원래 ‘키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중 2018년 말 B씨를 손님으로 알게 됐다. 당시 B씨는 자신을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로 소개하며 “월수입으로 2500만~3000만원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팝콘티비에서 벗방을 하라면서다.

유흥업소 종사자 등은 성범죄를 당해도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전력이 약점으로 잡힐까 두렵다’는 이유로 신고를 더욱 주저할 수밖에 없다. n번방 운영자 문형욱(대화명 갓갓·구속기소)도 성매매 여성 등을 타깃으로 삼았다.

벗방 거부하자 “대화만 해도 돼”

A씨는 많은 사람이 보는 방송에서 옷을 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B씨는 “벗지 말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정도만 하면 된다”며 달랬고, A씨는 받아들였다. 2019년 1월 이들은 계약서를 작성했다. 비용을 제외한 방송 수익을 A씨와 B씨가 50대 50으로 나눠 갖는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방송을 위한 원룸과 장비 등이 제공됐다. 계약기간은 2020년 1월까지 1년 간이었다.

계약 후 “벗방 해야 돈 번다” 압박

BJ로 나선 A씨는 약속대로 옷을 벗지 않고 방송을 했다. 문제는 시청자가 주는 유료 아이템이 변변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자 B씨는 “돈을 벌려면 벗방을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다른 벗방 영상 등을 보여주며 “따라 하라”고도 했다. 팬티만 입은 채 성행위 시늉을 하고 신음을 내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A씨는 마스크를 쓰고 벗방을 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실명과 집주소 등 신상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2019년 10월 B씨에게 울면서 “도저히 못 하겠다”고 했다.

B씨는 “회사가 네게 쓴 돈이 어마어마하다”며 그만두지 못하게 했다. 12월에는 계약서를 가지고 오게 한 뒤 계약기간을 ‘2019년 1월부터 2020년 1월까지’에서 ‘2020년 3월부터 2021년 5월까지’로 수정했다.

A씨가 힘들어하자 B씨는 방송 플랫폼을 팝콘티비에서 팬더티비로 바꿨다. 그리고 기존 약속대로 탈의 없이 대화만 하는 방송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수입이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고, B씨는 다시 “벗방을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악순환이었다.

다른 벗방 채널. 본문에 언급된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음. 김민중 기자

다른 벗방 채널. 본문에 언급된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음. 김민중 기자

그만두려 하자 “위약금 1000만원”

2020년 4월 A씨가 “아예 방송을 그만하겠다”고 하자 B씨는 “위약금 1000만원, 방송장비 비용 100만원, 원룸 임차 보증금 1000만원, 수입 일부(100만원)를 입금하라”고 요구했다.

A씨가 거절하자 B씨는 공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너 목 한 번 제대로 뜯어서 싸움 한 번 해볼까” “일상생활 못 하게 만들어 줄까”라며 위협하고 벗방을 계속하든지 돈을 내놓든지 선택하라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A씨는 고소장을 내게 된 것이다. 현재 A씨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따른 탈모와 소화기능 장애, 대인기피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

“기획사, 유령회사로 추정”

A씨의 고소 대리인인 이강수 변호사는 “B씨의 ○○○엔터테인먼트는 사업자 등록, 대중문화예술기획업 등록 등이 안 돼 있는 유령회사로 추정된다”며 “A씨의 수익에서 떼간 4200만원은 사기로 떼먹은 금액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B씨가 위약금 등을 거론하며 벗방을 계속하도록 한 건 강요미수라는 주장이다. 실제 기자가 계약서에 나와 있는 ○○○엔터테인먼트 주소(서울 강남구 역삼동)로 찾아가 보니 사무실을 찾을 수 없었다. 건물 관계자는 “그런 회사는 없다”고 말했다.

B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엔터테인먼트 주소로 지목한 빌딩. 그러나 현재 찾아가 보면 사무실을 찾을 수 없다. 카카오맵

B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엔터테인먼트 주소로 지목한 빌딩. 그러나 현재 찾아가 보면 사무실을 찾을 수 없다. 카카오맵

“쉽게 돈 벌려 했던 것 후회”

A씨는 피해를 호소하면서 자책하기도 했다. 그는 “애초에 쉽게 돈을 벌려고 키스방에서 일하고 벗방 쪽에 발을 들여놓은 게 후회스럽다”며 “이제 정상적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A씨뿐만 아니다. B씨에게 당했다는 BJ가 1명 이상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B씨는 인터뷰 요청에 “오래전에 사업을 접었고 더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기획사의 범행으로 보이는 정황도 있다. 지난달 14일 네이버 지식iN에는 “벗방 엔터와 계약했는데 예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가 너무 힘들다” “사장한테 말해봤는데 위약금 등을 내야 한다고 해서 계약해지를 못 하고 있다”는 상담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글쓴이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 살고 싶다”고 호소했다.

네이버 지식iN에 올라온 벗방 피해 상담 글. 김민중 기자

네이버 지식iN에 올라온 벗방 피해 상담 글. 김민중 기자

“피해자 많아…집중 수사 필요”

전문가들 사이에선 “디지털 성범죄를 특별 단속 중인 수사당국이 인터넷 벗방 BJ에 대한 성 착취 문제도 집중 수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서승희 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피해 BJ가 많고 대부분은 신고를 주저하고 있다”며 “BJ들의 피해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벗방뿐만 아니라 ‘맞방(맞는 방송)’ 관련 범죄도 불거진다. 지난달 22일 인천 서부경찰서는 미성년자에게 맞방을 강요한 20대 남성 3명을 검거하기도 했다. 맞방과 벗방이 혼합된 방송도 흔히 볼 수 있다.

김민중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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