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스피커 15대, 턴테이블 8대 가진 오디오 매니어 "궁극은 음악"

중앙일보

입력

아날로그 사운드 매니어인 김기인씨. "기계보다는 음악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날로그 사운드 매니어인 김기인씨. "기계보다는 음악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 정도는 돼야 아날로그 오디오 편력이 아닐까. 김기인 씨의 서울 용산구 작업실에는 스피커 15세트, 턴테이블 8대, 그리고 손으로 돌려 듣는 극단의 아날로그인 유성기 9대가 있다. 그의 집에는 유성기 20대가 더 있다.

2018년 낸 책 『아날로그 오디오』에는 스피커, 앰프, 턴테이블 등의 오디오 기계 500여 종이 세세히 분석돼 있다. 650쪽, 3㎏에 육박하는 책이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후 설계 사무소에서 일하다 음향 건축 쪽으로 옮겼다. 대학 시절부터 고전음악감상실의 진행자로 일하면서 음악과 기계라는 관심사를 연결했다. 지금은 오디오 기계를 수입하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30여년 ‘오디오질’을 한 공인 오디오 전문가 김씨는 “오디오를 해보니 오디오보다 음악”이라고 했다. “기계를 찾아 바꾸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이 잘 들리고 이해하게 된다. 그때 오디오를 멈춰야 한다.”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LP는 1만2000장. 수억원어치다. “처음에는 기계의 작은 부분만 바꿔도 소리가 확 달라지는 게 재미있어서 오디오를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연주자들만의 고유한 음악성과 완벽한 표현에 홀리게 된다. 그때부터는 소프트웨어인 음악에 집중하게 된다.” 그는 “오디오가 장기 수라면 음반은 바둑 수인 셈이라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김씨가 오디오를 시작한 건 특별한 청각 때문이었다. “소리를 들으면 다른 감각으로 바꿔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밝다, 어둡다, 거칠다, 따뜻하다 등의 다른 감각으로 바꾼다.” 턴테이블 위의 바늘인 카트리지에서 시작해 프리 앰프, 파워 앰프를 거쳐 스피커까지 작은 부분만 바뀌어도 변하는 미세한 소리를 그의 귀는 큰 차이로 인식한다. 음이 퍼지는 공간의 크기와 구조에 따른 소리의 변화까지 건축가의 감각으로 감지해낸다.

그는 “오디오의 시작은 무조건 스피커”라고 조언한다. “원하는 스피커를 선택하고 그 스피커를 울려나가기 위한 나머지 장비를 매칭하는 것이 오디오다. 전원을 위한 줄은 어떤 재료로 된 것을 쓸 것인가까지, 또 벽에는 무얼 붙일 것인가까지 결정하게 된다.” 또 “스피커의 중요성은 보편적이지만 오디오를 갓 시작하는 사람은 헷갈릴 수도 있다”고 했다. 이뿐 아니라 가장 많이 듣는 음악 장르, 설치할 공간의 크기, 음악의 용도, 라이프스타일까지 고려해 기계들을 조합한다.

30년 오디오 매니어이자 음악 애호가인 김기인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30년 오디오 매니어이자 음악 애호가인 김기인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처럼 수많은 요소에 따라 소리가 변하는 데에 반해서, 그는 아날로그를 떠난 적이 없다. “1981년에 디지털이 나와 CD 시대가 시작됐다. 그때 LP를 다 내다 버린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디지털로 간 적이 없다.” LP는 1만2000장이 있지만 CD는 500여장도 안 된다. 최근엔 다시 아날로그가 대세다. 유럽에선 LP 판매량이 CD를 넘어섰다고 한다. 그는 “아날로그 시대가 다시 올 것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LP의 아날로그는 편안했고 CD는 자연스럽지가 않았다”고 했다. “CD는 변경이 안 된다. 화석 같은 거다. 하지만 LP는 내가 손 보는 것만큼 변화된다. 1㎜의 1000분의 1인 미크론(μ) 정도로 얇은 바늘 하나, 전깃줄 재료만 바꿔도 소리가 달라진다.”

하지만 오디오라는 기계에 대한 맹신은 금물이다. 기계를 미신처럼 믿는 것도 위험하다. “소리는 항상 달라진다. 방에 화분을 놓거나 한 사람만 더 들어와도, 심지어 조명과 습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결국 소리란 뭔가. 없는 것, 무(無)다. 따라서 어떤 오디오도 절대적인 게 아니다.” 비싼 오디오가 좋다거나 무조건 구형이 우수하다는 믿음, 제조사에서 개선안을 내놔도 믿지 않고 옛 모델을 찾는 태도 등을 그는 경계한다. “누가 뭐래도 내가 듣기에 좋은 소리가 좋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계에 충성하는 대신 음악이라는 본질에 집중하라는 것이 30년 오디오 매니어의 결론이다. “59년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LP 녹음한 레오니드 코간의 연주는 지금껏 어떤 연주자도 극복하지 못한 높은 음악성이 있다. 이 음반은 초반의 경우 1000만원까지 가지만, 수백억원을 들여도 아깝지 않을 경험이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바흐의 모음곡을 최초로 녹음한 36년 초반을 외국 서점을 뒤져 구하고, 한 장에 수천만원까지 가는 국악 LP를 찾으러 다닌 이유다.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 중 가장 끝단에 있는 것이 음악이다. 오디오는 그 음악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가 오디오 초심자에게 알려주는 가이드에는 연주 현장과 같은 소리를 내는 ‘음장감’, 선명한 정도인 ‘해상력’, ‘투명도’ 등이 있지만 1번으로 꼽는 것은 ‘음악성’이다. 즉 기계의 소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맞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학생 시절부터 라디오를 분해했다 조립했던 기계광이자 오디오 매니어인 그는 “기계가 아무리 좋아도 인간의 음악성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