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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순간도 사랑처럼, 의외의 순간에 오는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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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연재 마친 김영민 교수

박종근 기자

박종근 기자

공부란 무엇인가. 추석이란 무엇인가. 평생 해본 적이 없던 질문들이다. 그저 시험 잘 보려고 한 것이 공부였고, 추석엔 습관적으로 전을 부쳤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불쑥 던진 “그건 공부가 아니지 않느냐” “명절엔 잘 쉬는 게 낫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가 잠자던 뇌세포를 흔들어 깨웠다.

온라인 강의는 위기 상황의 미봉책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우는 것 있어 #대학 입시용 공부에 그쳐서는 곤란 #진짜 공부는 안목·시야 터득하는 것 #코로나19 방역 한국의 선방 #다이나믹한 ‘헬조선’ 장점 살린 덕

중앙SUNDAY에 1년 7개월여간 연재한 ‘공부란 무엇인가’ 칼럼에서도 그는 근본적인 생각 거리를 던졌다. 공부란 대학에 가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것이며, 대학에 가서는 무엇을 어떻게 배우면 좋은지에 대한 논의들이었다. 칼럼을 읽는다고 갑자기 공부를 잘하게 될 리는 없었지만, 독서와 토론과 글쓰기 같은 공부의 방법론에 관한 리드미컬한 그의 조언들은 ‘생각의 근육’을 키우게 했다. 칼럼을 마친 그를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공부란 무엇인가’는 신입생 필독서 같았다. 본인은 대학 때 어떤 공부를 했나.
“우리는 사실 대학에서 공부를 별로 안 한 세대라 대답이 궁색한데, 헌책방 돌아다닌 게 좀 공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학점 잘 주는 수업 말고 좋은 강의를 골라 듣는 감각도 있었고. 좋은 수업이란 정보량도 상당해야 하지만 정보를 꿰뚫는 안목·시야·관점을 부여해야 한다.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과목을 선택하게 되니까 그런 안목이 굉장히 중요한데, 저는 중고등학교 때 독서회 활동도 하고 삼중당문고 같은 책을 쭉 읽은 게 도움이 됐다. 역설적으로 대학 때 잘 지내기 위해선 중고등 시절에 그런 감각을 키우는 게 중요한 셈이다.”
입시 위주의 중고등 교육과정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예컨대 의대나 법대에 들어가 제대로 공부를 해서 드라마에서 보는 훌륭한 의사, 정의로운 검사가 되려는 중고생들은 무슨 공부를 하면 좋을까.
“어느 직업에나 이상적인 직업윤리가 있겠지만, 윤리 교육이란 게 학교에서 교육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교과서를 잘 읽어서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나. 예비군 훈련에 다녀와서 갑자기 애국자가 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윤리적인 인간이란 누가 주입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럴 만한 환경에 놓여야 하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삶의 어떤 예상치 않은 국면 안에서 깨달음이 오는 거니까.”
지난 인터뷰(본지 2019년 2월 2일자) 때 “최근 한국에서 계층이동을 위한 경쟁이 돈 있는 자들의 게임이 된 것이 문제”라고 했는데, 이후 고위층 자녀들의 스펙 품앗이 풍조가 드러나면서 바로 그 문제가 대두됐다.
“윤리적 문제에 대한 비판은 많이 나왔으니 반복하고 싶지 않고, 자녀를 위해 품앗이할 게 많을 텐데 왜 하필 스펙을 품앗이하는지 흥미로웠다. 친한 사람의 자녀가 있다면 지식이나 운전이나, 정말 뭔가를 잘 가르쳐주는 품앗이도 있을 텐데. ‘내가 저 집 자식을 한 번 윤리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면 사람들이 좀 덜 분노하지 않았을까(웃음). 스펙 말고도 품앗이할 게 많다는 걸 얘기하고 싶다.”

동영상 강의 효과에 대해선 유보적 입장

그래픽=이은영·이정권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이정권 lee.eunyoung4@joins.com

그는 지난해 말 논어 에세이집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사회평론)을 출간했다. 동양 고전을 텍스트 삼았다고 고루한 ‘공자님 말씀’은 아니다. 현대인이 살아가는 현재의 삶과 세계를 고전을 레퍼런스 삼아 경쾌한 반전화법으로 통찰했다. 국가 권력에 대한 개인의 자세를 다룬 ‘성(省)’편에서, 역병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국가의 통제나 감시보다 자기 통제와 양심이 관건이라고 넌지시 일깨우는 식이다.

“사람들은 구속받는 걸 싫어하잖나. 그런데 역병과 전쟁이라는 두 경우 국가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상황이 된다. 그런 계기를 통해 국가가 힘을 확장하는데, 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결국 장기적으로 그런 국가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강제한다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만일 이 사태가 장기화한다면, 그 밖에 어떤 식으로 필요한 삶의 형태를 창출할 건지 빨리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강제부터 윤리의식이나 인센티브 같은 동기부여, 영혼의 울림을 듣는 일까지 다양한 요소가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식 감염병 예방법이 조명받고 있다. 인권 침해라는 시각도 있는데, 한국에서 이런 법률이 가능한 이유가 뭘까.
“최근 국민 대다수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느낀다고 한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다들 ‘헬조선’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불과 1년 사이 실제 선진국이 됐다고는 보기 어렵고, 사견이지만 ‘헬조선’이라서 방역에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 아닐까. ‘헬’에 부정적인 뜻만 있지는 않지 않나.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열정적이라는 뉘앙스도 있다. 오히려 선진국에 가보면 특유의 권태와 게으름이 있다. 평소 긴장 없이 살면서 힘든 일은 이주노동자에게 외주를 주는 게 선진국의 실상 아닌가. 국민을 순식간에 동원할 수 있고, 국민은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헬조선’이기에 가능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초유의 온라인 강의는 잘 적응 했는지.
“어렵다. 지금은 위기상황의 미봉책일 뿐이니까. 제대로 동영상 강의를 하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과 자원을 들여서 시나리오도 짜고, 로케이션도 가고, 그런 투자를 통해 수업을 구성해야 한다. 동영상 강의의 효과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입장이다. 사람이 강의 콘텐트 전달을 통해서만 배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콘텐트 전달은 책으로 하면 된다. 강의는 서로 얘기를 나누고, 헛소리도 하고,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얘기로 번지는 과정에서 더 배우는 면이 있지 않나. 남녀 간의 만남도 한 번 사귀어보자고 정면으로 스펙 교환할 때 사랑이 싹트는 게 아니라 의외의 순간에 사랑의 감정이 생기듯, 배움의 순간도 원래 준비해온 콘텐트를 단순 전달하는 데서 생기지 않을 경우가 훨씬 많다고 보고, 그런 것들을 허용하는 수업 구성을 해 왔다. 지금 환경에서 가장 큰 도전은 그런 게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몇 달 동안 학교에 안 가도 되는 아이들을 보며 ‘학교란 무엇인가’ 싶었다.
“학교라는 환경 자체가 중요하다. 캠퍼스에 들어가는 자체가 바깥세상과 다른 영역에 진입하는 것이다. 공부의 과정 중 지식 콘텐트 전달에서 배우는 건 굉장히 일부분이다. 그 여백에서 전해지는 게 교육의 핵심일 수 있다. 학교 건축이나 캠퍼스 설계가 달라야 하는 이유다. 이참에 캠퍼스를 인터액션을 위한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단순히 건물 속에 애들을 수용하는 거라면, 큐레이터가 전시장에 사람들을 대충 밀어 넣는 것과 똑같지 않나.”
이수경 작가의 ‘이동식 사원’.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이수경 작가의 ‘이동식 사원’.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그는 교육 뿐 아니라 예술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언택트’가 ‘뉴노멀’이 된다고 해도, 공연·전시 등 전통적인 오프라인 콘텐트에는 온라인 체험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공간의 마법’이 있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도 예술작품에 대한 직접 체험이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심장한 경험을 선사한다고 했다.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들어간다는 건 일종의 ‘정신의 인큐베이터’처럼 특수한 체험을 하도록 설계된 비현실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다. 현대미술을 위한 화이트큐브는 문에 들어가면서부터 작품만 보는 게 아니라 동선을 체험하고 나오도록 큐레이션 된다. 동선을 따라 걸으며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상상을 자극받도록 설계된 전시가 훌륭한 전시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소장품’ 전에 가보면 알 수 있다. 부처 뒷모습을 그린 병풍이 흥미로웠는데, 좀 가다 보니 커튼으로 닫힌 창을 그린 그림이 있더라. 순간 ‘창에도 뒷모습이 있다면 커튼을 친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별개 작품들을 봤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생각이다.”

좋은 산문 유통 위해 서평지 발행할 것

김영민 교수는 ‘공부란 무엇인가’를 끝내자마자 중앙일보에 ‘생각의 공화국’ 연재를 시작했다. 그 밖에도 다양한 매체에 방대한 지식을 쏟아내고 있는 걸 보면 ‘공부는 언제하나’ 싶다. 이에 대해 그는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쭉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왔다”며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읽고 쓰고 있기에 가능하다. 다른 분들도 책과 거리를 좁히고 사회적 거리를 두면 될 거다”라고 했다.

글을 많이 쓰는 이유는 “한국어로 쓰인 좋은 산문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란다. 1년 안에 직접 고급 서평지를 내려고 동료들과 기획 중인데, 역시 “좋은 글을 다량으로 유통시키기 위해서”다. “논술 출제를 가보면 전문가들끼리 ‘지문으로 쓸 만한 한국어 글이 정말 부족하다’는 얘기를 한다. 학생들이 읽으면 좋고 문제로 낼 만한 현대 한국어 산문이 적다는 거다. 좋은 글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다량으로 유통시켜야 할 필요를 느껴서 뜻맞는 사람들과 고급 서평지를 내자고 의기투합했다. 신간 소개를 넘어 해당 책을 뒷받침하는 학식과 글 자체로서도 좋은 고급 서평을 모은 매체가 될 거다.  해외에는 많다. 우리도 그런 서평지가 활성화되면 정보 제공은 물론 비판적인 글을 통해 책의 장단점도 생각해보게 되고, 무엇보다 좋은 산문이 많이 쓰여지겠지. 궁극적으로 좋은 산문의 유통이야말로 공부의 기본 바탕에 공헌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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