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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선 양적·질적 방법론보다 설득력부터 잘 배워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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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호 26면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의 생애주기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 같은 것은 없다. 한 번의 생으로도 충분하다. 그 한 번 산다는 일에 생애주기가 있듯이, 공부에도 생애주기가 있다. 사시사철 과일이 나오긴 하지만, 아주 맛있는 사과를, 딸기를, 체리를, 홍시를 먹을 수 있는 때는 사실 일 년 중 정해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어떤 공부는 누적적이어서, 가을에 어떤 책을 읽기 위해서 봄에 읽으면 좋은 책들이 있다.

청소년 때 육체적 힘 펼쳐 보고 #외국어 배우면 다른 세계에 접속 #기초 안 쌓으면 지적 감기 걸려 #설득하고 설득당할 줄 알아야 #엄한 선생 못 만나면 재야 고수 #“인생 역전” 홀리는 약장수 조심

물론 이것이 연장자가 더 나은 견해를 가졌을 거라는 말은 아니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소명으로서 정치』에서 막스 베버가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토론하면서 출생증명서의 생년월일을 들먹이며 이기려 드는 상대를 나는 참아본 적이 없다. 상대가 스무 살이고 나는 오십이 넘었다는 사실 하나로 내가 더 성취하고 더 배웠다고 할 수 없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삶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단련된 실력, 삶의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단련된 실력, 내면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

어렸을 때는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그 시절만큼은 존재한다는 거 자체가 어떤 쾌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할 수 있기 바란다. 그러니까, 먹고 자고 싸고 움직이고 쉬는 일이 시원하기를 바란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배워서 되는 일이다. 그리고 감정이 머리와 가슴 속을 잘 지나가게 하는 습관을 들이고 싶다. 이 정도다, 어린 시절에 기대하는 공부는. 이것만 잘되면, 나중에 쓸데없는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청소년기에는 타고난 육체적 역량을 최대한 펼쳐보는 체험을 하고 싶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배워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꼭 해봤어야 하는데 해보지 못해서 안타깝다. 잘 먹고 들소처럼 뛰었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누워 있었다. 외국에 살 때 부러웠던 것은, 교육자들이 청소년의 체육교육에 지극한 관심과 공을 들인다는 사실이었다.

대학원생이 지적 옹알이 해서야 …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외국어는 단지 여행 도구나 취직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국어로만 이루어진 세계와는 현격히 다른 의미 세계에 접속하는 열쇠이다. 외국어를 배워 보아야,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만큼 생각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외국어를 못해서 좋은 점도 있다. 못하는 외국어로 욕을 먹으면, 큰 욕에도 별로 상처받지 않는다.

단순히 외국어뿐 아니라, 한문이나 라틴어 같은 고전어도 배우고 싶다. 한문을 모른다고 한국어 생활에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언어생활이 깊어질 수 있는 확실한 기회 하나를 놓치게 된다. 한문을 모르면 짐승들끼리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며 서로를 위로하게 된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운전, 요리, 각종 수리의 달인이 되고 싶다. 생활의 편의도 편의지만, 연애하는 데 아주 쓸모 있을 것 같다. 운이 좋아 대학생이 되고 난 뒤에는, 의무적인 인성 교육 따위는 받고 싶지 않다. 참고 받는 인성 교육이라면, 인성은 나아지지 않고 인성 교육이라는 미션을 하나 클리어했다는 느낌만 남을 것 같다. 남을 착취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고 싶다. 왕자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흑화되고 싶지 않다.

기초체력을 안 쌓으면 나중에 감기에 자주 시달리듯, 지적 기초를 안 쌓으면 지적 감기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운 좋게 대학에 들어갔다면, 읽기·쓰기·말하기·듣기를 고루 잘 배우고 싶다. “양방”(양적 방법론)과 “질방”(질적 방법론)은 좀 나중에 배워도 된다. 일단 “썰방”(말하고 쓰는 법)을 잘 배워야 한다는 학교 전설이 있다. 설득할 줄 알고 설득당할 줄 알기를 바란다. 자신이 틀렸다는 게 판명되었다고 갑자기 미친 척해서 모면하려 들지 말기를 바란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주 아주 최고급의 교양강의를 들어보고 싶다. 들으면서 샘물 같은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

직장생활 부적응자로 판명되거나, 책 읽기를 비정상적으로 좋아하거나, 수중에 돈이 있으면, 자칫 대학원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대학원의 교육목표는 대학의 교육목표와 다르다. 아무도 떠먹여 주지 않는다. 정답이 있는 주어진 문제만 풀어온 사람은 이 단계에서 좌절할 것이다. 자기 스스로 연구 질문을 던지고, 리서치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 부분을 모르겠어욤…기분이 찝찝해욤…토끼의 간을 주세욤.” 이렇게 지적 옹알이를 할 수 있는 때는 지났다. 순간의 통찰이니 뭐니 하는 ‘지랄병’ 하지 말고, 연구자들이 누적해 온 지식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연구자의 길을 가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 객관성을 위해 도덕적 결단을 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러한 도덕적 결단 없이는 탐구와 인식의 객관성이 확보될 리 없다. 자칫 자기가 보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기고, 자기가 못 하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인식론적 객관성을 존중하는 자세가 몸에 익으면, 누가 봐도 못생긴 아이를 두고 예쁘다고 강변하는 부모에게 엄연한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릿속 모든 것을 입 밖에 내야 할 필요는 없다.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은 엄한 선생을 만나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과제를 많이 내주고 날카로운 비평을 해주었기에 결코 흠뻑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배운 것이 많아 용서하게 되는 엄한 선생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엄한 선생 없이는 애매한 재야고수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재야 고수가 프로 선수에게 ‘처 발리는’ 영상이 널려 있다. 학문의 길은 재야고수의 길보다 잔인하다. 자신은 결국 공부에 적합한 지력과 소명의식이 없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장기 프로젝트는 없다.

학문의 길, 재야 고수 길보다 잔인

그러다 보면 중년이 된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는 약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 특히 예언가들을 조심해야 한다. 검증하려야 검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그 진릿값을 보장할 수는 없다. 아나톨 프랑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헛소리를 믿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여전히 헛소리라고. 그동안의 무식을 일거에 날려 버릴 벼락같은 통찰, 일종의 인생 역전만루홈런을 치게 해주겠다는 약장수들을 조심해야 한다. 공부는 산삼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기립성 저혈압 환자를 갑자기 포복형 고혈압 환자로 만들 수는 없다.

중년이 되면 차라리 결핍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 결핍이 오히려 가능성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청장년 시절의 어떤 결핍이 오히려 자원이 되어 있기를. 그래서 결핍으로 고통받기는 했지만, 결핍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고 사는 인생이고 싶지는 않았다고 나직하게 중얼거릴 수 있기를 바란다.

노년이 되면 체력이 현격히 저하된다. 그때 가서 새삼 구해야 할 나라 같은 게 있으면 너무 피곤할 것 같다. 꾸준히 공부해왔다면, 공부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공부하기 위해 매번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단에 필요한 에너지를 절약하여,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배우는 거다. 수중에 돈이 있으면 기꺼이 지불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때가 온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사놓고 그때까지 안 읽은 책들은 이제 포기하겠다. 이 단계가 되면 내 삶에 들어왔다가 나간 동학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천천히 치우겠다. 부고는 들리지 않고, 다만 근황을 듣기 어려울 것이다. 잠시 쉼호흡을 하고 작은 응접실의 불을 끄는 거다. 이것이 삶이었나요? 이미 다 지난 일이군요. 〈끝〉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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