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개혁 제대로 하자] 의료 족쇄 504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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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모 종합병원 과장 金모(47) 씨는 최근 친구로부터 "돈을 댈테니 세계 수준의 암전문 병원을 만들어보자" 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金씨는 "돈을 꿔준다면 모르나 일반인의 직접 투자는 불가능하다" 며 돌려보냈다. 의사가 아닌 일반인은 병원을 세울 수 없다는 규제 때문이다.

우리 의료환경은 규제로 꽁꽁 묶여 있다. ´의료=공공재´ 란 생각에서 나온 규제가 쌓이면서 의료산업의 건전한 발전까지 가로막는 지경이 된 것. 정부가 인정한 의료.약사(藥事) 부문의 규제 7백8건 중 아직도 5백44건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의료기관 설립 자격(의료법 30조) . 일반인은 물론 주식회사 같은 영리법인도 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없다.

이 규제는 의사들의 의료서비스 독점을 초래했고, 의료기관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자본을 구하지 못한 의료기관들은 비싼 은행 대출을 쓸 수밖에 없어 재무구조가 나빠졌다.

경희의료원 안회영 교수는 "자선병원.공공의료기관 외에는 병원에도 영리법인을 허용해 이윤을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며 "운영이 잘돼 돈을 남겨야 재투자가 되고 서비스도 개선된다" 고 말했다.

미국은 의료와 관계없는 자본가들이 병원산업에 진출해 규모와 경쟁력을 키웠고, 나스닥에 등록되는 병원 주식회사까지 생겼다.

의료기관 광고 규제(의료법 46, 47조) 도 문제. 의료 광고엔 의사 이름.성별.진료과목 및 전화번호 등 간단한 ´외양´ 만 소개할 수 있다.

병원 시설이나 전문분야를 알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국민들은 미국 MD앤더슨이 폐암 치료에 세계 일류란 말은 들었어도, 국내 병원 중 어디가 어느 분야 전문인지는 잘 모른다.

김한중 연세대 보건대학원장은 "과대 광고를 막자고 만든 규제지만 결과적으로 환자들이 자신의 질병 치료를 어느 병원이 잘하는지 모른 채 방황하게 만들고 있다" 고 말했다.

규제는 자구노력을 하는 의료기관의 발목까지 잡고 있다. 까다로운 의료기관 설립기준이 그중 하나.

종합병원의 경우 1백개 이상 병상에 내.외과 등 8개과 전문의를 갖춰야 한다. 병원협회 성익제 사무총장은 "한두개 과를 포기하고 특정과를 강화하려 해도 획일적 기준 때문에 낭비를 하게 된다" 고 지적했다.

규제에 묶여 있긴 약국업도 마찬가지다. 약사가 아니면 약국을 열 수 없다. 어떤 약품을 비치하고 있는지 알릴 수도 없다.

메디소프트 박인출 대표는 "정부가 의약기관의 생사를 틀어쥐고 있는 규제를 풀어야만 경쟁력이 살아난다" 고 강조했다. 설립과 활동은 자유롭게 하되 경쟁력이 없는 곳은 망하게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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