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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인생후반, 배부른 돼지보단 배고픈 소크라테스처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49)

탤런트 김영철씨가 진행하는 ‘동네 한 바퀴’라는 TV 프로그램에 성수동 재래시장 안에 있는 가방가게의 사연이 소개됐다. 요즘엔 전통시장의 허름한 가게에서 가방을 사는 사람이 거의 없지 싶다. 그래서인지 가방 판매로 장사를 하기는 힘들어 가방은 벽에 몇 개 구색 맞춰 걸어놓고 가게주인은 더덕이며 나물을 다듬어 가게 밖에서 팔고 있었다.

이 아주머니는 지난 20여년간 점심밥을 지어 이웃과 나눠 먹고 있었다. 사연인즉, 어려울 때 자신을 돕고 자신의 가게를 이용했던 이웃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또한 매일 노숙자 한 명에게 무료 밥상을 마련해 주는데 나보다 못한 이웃과 함께하고자 해서란다.

이 상인의 사연을 소개하고 떠나던 김씨가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발길을 돌려 아주머니에게 전하면서 “아주머니, 이 고기는 이웃 말고 아주머니만 꼭 드세요”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아마 남을 위해 베푸는 상인의 마음에 감복해서일 게다. 그리고 프로그램 말미에 하는 말. “오늘 나는 ‘삶은 소유가 아니라 나눔’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어느 감명 깊은 영화의 가슴 뭉클한 장면 하나를 본 듯하다. 나눔의 성스런 아름다움이란….

노인 교실과 내가 만든 어르신들 놀이용 퍼즐. [사진 한익종]

노인 교실과 내가 만든 어르신들 놀이용 퍼즐. [사진 한익종]

소유와 나눔의 차이는 무엇인가. 둘 다 재물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행위 자체는 정반대이며 의미 또한 천양지차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가 진정 행복한 삶을 위한 행위일까? 나눔일까, 소유일까? 문득 공리주의의 창시자인 벤덤과 그를 신봉했으나 후일 조금 다른 공리주의를 주창했던 죤 스튜어트 밀이 생각난다. 양적 공리주의를 주창했던 벤덤을 따르던 밀은 후일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택하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질적 공리주의를 강조했다.

밀은 출세 가도를 달리며 부, 명예, 권력을 누리는 과정에서 문득 삶의 회의를 느끼게 된다. 물질적 풍요만이 행복한 삶은 아니라는 허무에 빠진 밀은 정신적 부유를 행복한 삶의 중요 요소임을 강조하면서 스승(?)인 벤덤의 이론에 반기를 든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밀의 이론에 이견을 다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단순한 재물의 많고 적음보다는 정신적 빈부가 인간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 증명된 게 아닐까 싶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소유라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면, 정신적 풍요로움은 소유보다는 나눔이라는 행위를 통해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나눔은 소유와는 달리 빈부의 격차와 환경의 차이에 의해 좌우되거나 장애를 받지 않는다. 누구나가 쉽게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현재 머리피부암과 낙상으로 인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올해 100세의 영국인 톰 무어씨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 세계를 감동하게 하고 있다. 얼마 전 100세 생일을 맞은 무어 옹은 자신의 뒤뜰 왕복 20m의 거리를 100번 걷는 조건으로 기부금 150만원을 모금해 코로나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을 돕겠다고 나섰다. 현재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그가 100번 걷기의 목표를 달성한 결과 이에 감동한 사람들은 무려 480억원이라는 거금을 모아 주었다. 무어옹의 사연을 접한 영국 왕실은 100세 생일에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해 줘 그의 숭고한 나눔의 정신을 기린 바 있다.

1m 당 1원의 기부금을 위한 '한걸음의 사랑' 회원들과 걷는 모습.

1m 당 1원의 기부금을 위한 '한걸음의 사랑' 회원들과 걷는 모습.

무어옹은 나눔이 빈부, 상황,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줬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내게 대단한 일을 해 줬습니다.” 정신적 행복감이 짙게 배어있는 인터뷰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부라고 하면 가진 사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가진 사람이 기부나 나눔에 오히려 야박하게 구는 것을 자주 본다. 나는 오래전부터 1m당 1원의 기부금 적립을 목표로 나홀로 걷기 캠페인을 가져오다 ‘한걸음의 사랑’이라는 걷기모임을 만들어 1m당 1원의 기부금을 장애아동의 치료와 재활에 써 달라고 푸르메재단에 기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내가 가진 재주를 가지고 어르신의 요양기관에 나가 취미교실도 열고 어르신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만들어 기부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건강도 도모하고 여행도 즐기며 적은 기부금이라도 이를 모아 불우한 이웃에게 도움을 준다는 생각은 나를 마냥 행복하게 한다. 또한 불필요해진 물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그림을 그리고 만듦으로써 창작력도 키우고, 무료한 생활을 하는 어르신에게 장난감을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내 자존감을 높이는 동시에 내가 사회에 필요한 이웃이라는 행복감에 싸이게 한다.

적은 돈, 작은 재능으로도 나눔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삶의 후반부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적 삶을 사는 게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적은 돈, 작은 재능으로도 나눔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삶의 후반부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적 삶을 사는 게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몇 푼의 돈을 더 갖는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 나만을 위해 무엇을 만드는 것은 큰 행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적은 돈, 작은 재능이 다른 이들을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정신적 풍요를 주기에 충분하다. 나의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기부나 나눔은 가진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든지, 어떤 상황이라도 가능하다는 걸 말해 주고 있다. 물질적 풍요보다는 정신적 풍요가 행복한 삶의 조건이라고 말한 죤 스튜어트 밀의 사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두 가지 삶의 유형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나만 잘살겠다고 발악을 하는 배부른 돼지의 삶을 살 것인가, 서로 도우며 함께 꾸려가는 삶인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이냐를. 비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더라도 삶의 후반부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적 삶을 사는 게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점점 명확해진다.

푸르메재단 기획위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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