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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일하니 즐겁다는 사람 vs 치사해서 못해먹겠다는 사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48)           

이제 인류가 직장생활로 일컬어지던 인생 2막으로만 생산 활동을 마치고 짧은 노년기를 지내 삶을 마감하던 시대는 이미 아니다. 이른바 유년기, 청·장년기를 지나 노년기의 전 단계에 일해야 하는 제3연령기라는 새로운 시기가 생겼다. 영국의 사회철학자 피터 레슬릿은 인류가 100세를 넘어 120세까지 생존이 가능한 시대라는 전제하에 새로운 삶의 단계가 출현했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제3연령기 (the third age)라 칭하는 단계이다.

제3연령기의 특징으로는 은퇴 후 마냥 쉴 수만은 없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과거 인류는 학창시절까지의 인생 1막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치렀던 인생 2막을 지나(은퇴) 기껏해야 1~20년의 노년기를 보내면 생을 마감하는 생애 단계를 가졌다. 그러나 이제는 100세 시대, 120세 시대를 구가하고 있으니 은퇴 후 30년이상을  무언가는 해야만 하는 피곤한(혹은 축복받은) 시대를 보내야만 한다는 얘기다. 생명 연장이 축복일지, 저주일지는 바로 이 제3연령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명함은 좋게 생각하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나를 옭아매는 함정이다. [사진 Pexels]

명함은 좋게 생각하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나를 옭아매는 함정이다. [사진 Pexels]

만 50세가 되던 해, 소위 괜찮은 직장에 사직서를 내밀고 인생 2막을 은퇴한 후, 새로운 삶에 도전한 지 10년이 지났다. 그 당시를 회상해 본다. 미래에 대한 어떤 구상도 없이 사직서를 낸 그때의 심경은 말 그대로 사막 앞에 선 황망함이었다. 그런데 내 당황스러움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은 퇴직할 즈음 걱정하는 부분이 노후의 생계유지, 즉 경제활동에 대한 고민이라고 하는데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달랐다. 베이비 붐 세대로 일컬어지는 우리 세대는 가부장적 사회 통념에 사로잡힌 세대인데 희망퇴직이건 정년퇴직이건, 회사를 그만두면 아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걱정과 5cm*9cm(명함의 일반적 크기)의 울타리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이었다. 지나고 생각하니 둘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그 두 가지 걱정 중 명함이 없어진다는 두려움에 관해 얘기 좀 해 보자.

명함은 좋게 생각하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나를 옭아매는 함정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직장인의 경우 명함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라고 생각하는 데, 내 생각으로는 이런저런 이유에서 남이 주고 남이 빼앗을 수 있는 명함이 나를 옭아매는 함정이다. 왜냐하면 인생 2막의 직장이란 대부분의 사람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어느 방송 앵커가 신간 서적의 제목을 ‘먹고살기 위한 일’이라고 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대부분의 직업이 먹고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인생 2막인 직장생활이 함정에 가까운 명함에 목매고 사는 게 현실이 아닌가. 이 명함이 없어지면 나타나는 박탈감과 무소속감,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외로움에 은퇴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내 취향과 특장점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평가되고 누군가에 의해 주어졌다 빼앗기는 명함이 인생 3막인 제3연령기에선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설사 계속 주어진다 해도 그게 인생후반부를 살아가는 데 정녕 중요할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인생 후반부엔 어떤 명함(직업)이 필요할까? 나를 옭아매는 명함이 필요할까, 나 스스로 만들고 나를 노년기까지 지탱해 줄 울타리로서의 명함이 필요할까?

봉사활동으로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들이 기거하는 요양보호소엘 가끔 방문하는 일이 있다. 그중 한 곳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근무교대를 하는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이 지옥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서 행복하다고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일하는 직장이, 더군다나 자신 하나 만에 기대는 어르신에게 봉사의 마음으로 즐겁게 일해도 될 까말까 한 요양보호사가 자신의 직장을 ‘지옥’이라고 평한다면 과연 제대로 된 요양 보호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다. 또 하나, 지옥에서 일해야만 하는 그의 생활은 얼마나 비참하나.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은퇴 후 소일거리 삼아, 용돈이라도 벌어 볼 요량으로 두 부부가 아파트의 소독작업에 나섰단다. 다녀와서 지인에게 털어놓은 불만은 아파트 주민들이 자신들을 하인 대하듯 해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는 얘기였다. 앞의 두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이고, 자기 일이 무가치하고 저속한 일이라 여기는 공통점이다. 그 생각의 바닥에는 바로 이웃을 위한 봉사, 함께 사는 사회에 자신이 크게 기여한다는 생각이 없어서이다.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던 함정이 아닌 무한한 세상으로의 탈출구로, 인생후반부의 든든한 울타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즐기고, 자신만이 가진 특장점을 내세운 명함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사진 Pixabay]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던 함정이 아닌 무한한 세상으로의 탈출구로, 인생후반부의 든든한 울타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즐기고, 자신만이 가진 특장점을 내세운 명함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사진 Pixabay]

반면에 자신이 인생 2막 동안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이웃에 봉사하면서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 제3연령기, 즉 인생 3막을 살아가겠노라고 작심하고 자신만의 명함을 만들어 생활하는 이웃들을 보자. 문화해설사로 근무하는 은퇴한 후배, 교직 생활을 마치고 아동지킴이로 나선 이웃, 60 넘어 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요양원에 나가는 아내, 조선의 역사를 다시 공부해 궁궐지킴이 봉사를 하는 지인, 산이 좋아 산으로 매일 출근해 산불예방 활동을 하는 이웃. 이들의 공통점은 나이 들어서도 적은 수입이지만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자신은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갖고 일에 보람을 느끼며 행복에 찬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만을 위해 남과 경쟁하며 살았던 직장생활, 남에게서 주어진 명함에 의지해 살았던 인생 2막과 어쩌면 인생 2막보다 더 오래 삶을 지탱해야 할 제3연령기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던 함정이 아닌 무한한 세상으로의 탈출구로, 인생후반부의 든든한 울타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즐기고, 자신만이 가진 특장점을 내세운 명함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명함의 글자 이면에는 이웃과 함께한다는 생각과 자세가 깔려 있어야 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제 21세기는 인류에게 인생후반부를 ‘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행복’이라는 생각으로 바꾸라고 주문하고 있다. 일할 수 있는 행복은 자기 스스로 자존감을 찾고 누군가 지속해서 자신을 찾게 해야 하는 데 그를 가능케 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봉사와 기여다.

푸르메재단 기획위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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