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에이즈 공포증 환자 급증

중앙일보

입력

잘 나가던 30대 초반의 대기업 사원 S씨는 올해초 갑자기 사직서를 썼다.

2년 전 술김에 서울의 한 사창가에서 매춘 여성과 관계를 맺은 후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에이즈 공포´ 때문이다.

그 이후 혓바늘이 돋을 때마다 병원을 찾아온 S씨는 그동안 30여 차례나 검사를 해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잠재워지지 않는 불안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S병원 담당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직´ 이란 최악의 선택을 한 S씨는 요즘도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을 찾아 에이즈 증세를 호소하고 있다.

50대 중반의 K씨는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에이즈 관련 사이트를 뒤지는 게 일거리다.

´에이즈 음성´ 이라는 담당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해 신종 에이즈 검사법을 찾아 사이버 세계를 헤매고 있다.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증상. 서울의 보건소와 병원을 전전하며 받은 에이즈 검사 횟수만도 50회를 넘어섰다.

에이즈가 연령.직업을 가리지 않고 확산하면서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한 ´에이즈포비아(에이즈 공포증) ´ 환자들이 덩달아 급증하고 있다. 일선 병원 감염내과.정신과에는 실체 없는 상상 속 에이즈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서울대병원 감염내과의 경우 일주일이 멀다하고 담당 의사를 바꿔가며 찾아오는 환자들 때문에 교수들마다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 병원 오명돈´(吳明燉) ´ 교수는 "에이즈 검사의 경우 오진가능성이 0.1%에 불과한데도 10여차례나 재검을 요구하는 등 병적인 증세를 보이는 환자가 많다" 며 "최근엔 e-메일과 전화공세도 심각한 수준" 이라고 말했다.

에이즈 관련 민간단체들이 운영하는 정보센터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이 운영하는 상담 전화의 경우 에이즈 공포 때문에 하루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사는 ´상상 감염자´ 들의 전화 공세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 ´ 권관우(權寬祐) 사무총장은 "에이즈 공포증에 걸린 상습상담자 중엔 단란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초반 여대생, 40대 평범한 주부, 점잖은 60대 노인 등 모든 계층이 포함돼있다" 며 "한국의 성 문화가 그만큼 문란해졌다는 증거" 이라고 말했다.

심한 경우 에이즈 공포가 자살 소동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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