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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소값 받으러갔다 시신 된 남편" 최정희씨의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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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제40주년 5·18 기념식에 참석해 5·18 때 잃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최정희씨를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제40주년 5·18 기념식에 참석해 5·18 때 잃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한 최정희씨를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열흘 만에 교도소에서 시신 된 당신” 

“당신이 떠난 지 40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날 일이 생생해요. 당신을 찾아 헤맨 열흘 만에 교도소에서 시신이 된 당신을 만났습니다. 보고 싶은 당신, 우리 만나는 날까지 부디 편히 쉬어요.”

[40주년 5·18기념식] #최정희씨 편지 낭독에 참석자들 '눈시울' #5·18때 교도소 앞 숨진 고 임은택씨 부인 #40년 전 한맺힌 사연…‘암매장 규명’ 촉각

 18일 오전 옛 전남도청 앞 5·18민주광장. 5·18 당시 남편을 잃은 최정희(73·여)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최씨는 이날 40주년 5·18기념식장에서 80년 5월 계엄군에 남편을 잃은 사연을 소개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편지 낭독을 끝낸 최씨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지난 세월을 위로했다.

 최씨의 남편 고(故) 임은택씨는 80년 5월 21일 광주교도소 앞에서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당해 숨졌다. 당시 임씨는 동네 이웃 3명과 함께 소 판매 대금을 받으러 광주로 갔다 귀가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임씨는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몰리면서 또다시 억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최씨는 “(5·18 당시) 소 장사를 하던 당신이 광주에 수금하러 간다기에 저녁밥을 안치고 있던 참이었는데 밥도 안 먹고 나갔었지요”라며 “그렇게 당신은 밥이 다 되고, 그 밥이 식을 때까지 오지 않았어요. 안간데 없이 당신을 찾아 헤맨 지 열흘 만에 교도소에서 시신이 된 당신을 만났습니다”라고 했다.

5·18 당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오른쪽은 '시민 습격설'을 제기한 옛 광주교도소 전경. 중앙포토

5·18 당시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오른쪽은 '시민 습격설'을 제기한 옛 광주교도소 전경. 중앙포토

신군부 왜곡, ‘교도소 습격사건’의 피해자 

 최씨는 또 “여보, 우리 다시 만나는 날 삼 남매 번듯하게 키우느라 고생 많았다고 칭찬이나 한마디 해주세요. 당신 참 잘했다고”라며 “보고 싶은 당신, 우리 만나는 날까지 부디 편히 쉬어요.”라고 끝을 맺었다.

 최씨의 남편 임씨는 신군부의 대표적인 5·18 왜곡 사례인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의 희생자다. 당시 임씨 일행은 5월 21일 오후 8시 담양으로 돌아오던 중 계엄군의 총격으로 2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더구나 임씨 시신은 열흘이 지난 5월 31일 다른 민간인 희생자 7명과 함께 교도소 관사 뒤 흙구덩이에서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하지만 신군부는 5·18 이후 임씨 등에 대한 학살을 ‘폭도와의 전투’로 왜곡하기 시작했다. 88년 국회청문회 당시에는 ‘(80년) 5월 21일 12시20분부터 익일 5시까지 시민군 광주교도소 공격(국보위 합동조사단의 보고서)’이란 내용을 추가해가며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로 폄훼했다.

5·18 당시 시민들의 교도소 습격사건의 허위성을 담고 있는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가 확인한 3공수 내부자료(원본)에는 시민들이 사망한 피격지점이 표시돼 있지만(왼쪽 2개) 88년 광주청문회 당시 제출됐던 자료에는 피격지점이 삭제돼 있다. [사진 전남대 5·18연구소] 프리랜서 장정필

5·18 당시 시민들의 교도소 습격사건의 허위성을 담고 있는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가 확인한 3공수 내부자료(원본)에는 시민들이 사망한 피격지점이 표시돼 있지만(왼쪽 2개) 88년 광주청문회 당시 제출됐던 자료에는 피격지점이 삭제돼 있다. [사진 전남대 5·18연구소] 프리랜서 장정필

‘교도소 병력배치요도’ 40년만에 확인

 올해 40주년 5·18기념식을 앞두고 교도소 습격이 허위임을 증명하는 신군부 측 문건이 나와 주목된다. 중앙일보가 지난 14일 입수한 ‘(광주)교도소 지역 병력배치 요도(5·18)’에 따르면 당시 교도소 앞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피격 위치는 교도소 습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으로 확인됐다.

 당시 교도소에 주둔한 계엄군이 표기한 사망지점은 교도소와 멀리 떨어진 광주~담양 간 도로 한복판이었다. 하지만 신군부가 8년 뒤인 88년 청문회 때 공개한 ‘교도소 병력배치 요도’에서는 시민 피격지점을 삭제함으로써 되레 교도소 습격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이용했다.

 더구나 이들 사망지점은 교도소 외벽에서도 100m 이상 떨어져 교도소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외부에 2층 높이인 5m짜리 장벽에 둘러싸인 데다 교도소 입구 밖 50m 지점부터는 장갑차와 소방차·트럭 등으로 철저히 차단됐다. 계엄군이 '피격지점'이라고 표기한 지점이 문건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교도소 공격하다 사망?…담양 가던 민간인

 문서에 남은 병력배치 현황도 교도소 습격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계엄군이 장갑차 등 핵심 병기와 버스·유조차 같은 차단막을 교도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도로에 집중해놓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계엄군의 이날 작전 자체가 교도소 방어가 아닌 광주~담양 간 도로를 차단하는 데 맞춰졌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보고 있다.

 전남대 5·18연구소 김희송 교수는 “교도소 습격사건이 나중에 신군부가 꾸며낸 허위 사실임을 밝히는 핵심 증거가 40년 만에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옛 광주교도소는 5m 높이의 외곽 담장으로 둘러싸인 데다 저격병까지 배치돼 시민들의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이라며 “광주교도소가 습격을 받은 곳이 아니라 계엄군의 일방적인 양민학살이 자행된 현장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진창일 기자, 이근평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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