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엔 상식이 깨지곤 한다. '중앙은행이 돈(M)을 많이 풀면 물가(P)가 오른다'는 1980년 이후 한 세대 이상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다수설이었다. 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상식이었다. 바로 15세기 이후 주기적으로 '파문당했다가 부활한' 화폐수량설(MV=PY) 때문이다.
그런데 돈을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기도 한다. 돈의 유통속도(V)가 떨어질 때다. V는 돈이 한 사회의 상품과 서비스 교환에 몇번이나 활용되는지를 측정한 수치다(V=PY/M). 한 마디로 '돈이 도는 속도'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캐피털이코노믹스(CE)에 따르면 미국 달러[총통화(M2)]의 유통속도가 올해 2분기에 1960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미 중앙은행이 최근 한 달 새에 수조 달러를 쏟아부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미국의 물가 압력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경제위기 와중엔 상상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 또 한번 입증된 셈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