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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화재]화마 피해 건물서 뛰어내려…父子의 엇갈린 운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9일 발생한 경기 이천 모가면의 물류창고 공사현장 화재와 관련해 30일 오전부터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등이 합동감식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유가족이 차 보닛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고 있다. 뉴스1

29일 발생한 경기 이천 모가면의 물류창고 공사현장 화재와 관련해 30일 오전부터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등이 합동감식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유가족이 차 보닛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고 있다. 뉴스1

38명의 사망자를 낸 이천 물류창고 화재 이후 꾸려진 합동분향소엔 외국인 노동자 3명의 위패가 함께 위치했다. 30일 오후 3시 경기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 합동분향소가 꾸려지자 유족 50여명이 몰렸다. 일부는 사망한 가족의 영정사진을 보며 오열했다. 다만 타지인 한국에서 사망한 외국인 근로자의 유족이나 친지는 찾을 수 없었다.

추락…아버지 사망, 아들은 수술

30일 유족들은 고인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눈이 붉어졌다. 29일 오후 물류창고 공사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이모씨 부자(父子)는 2층에서 근무 중 불이 나자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불길이 순식간에 타올라 1층 출구로 나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자는 함께 뛰어내렸고, 아버지가 사망했다. 아들(34)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다.

유족들에 따르면 아들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의 생사를 계속해서 물었다고 한다. 당시 현장 구조가 끝나지 않아 아들은 아버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수술 이후 의식을 찾고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아들 이씨의 이모는 “의식을 찾고 깨어난 아이에게 ‘아버지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기도 이천시의 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현장에서 30일 오전 소방관들이 잔해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기도 이천시의 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현장에서 30일 오전 소방관들이 잔해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씨 부자의 사이는 각별했다고 한다. 이들은 지난 5년간 전국을 돌며 공사 현장 등에서 합을 맞춰 왔다. 아버지가 사수, 아들이 부사수를 맡으며 ‘2인 1조’로 움직였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자신의 사업체를 차리는 게 목표였다.

"언니는 피해자의 아내이자 어머니"

아버지 이씨의 아내이자 아들의 어머니인 A씨는 아들이 수술을 받은 병원에 있다. A씨의 동생은 그에게 남편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차마 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38명의 희생자 중 9명은 지문 등이 훼손돼 신원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아버지 이씨는 9명 중 한 명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DNA 분석 결과는 다음달 2일 나올 전망이다.

30일 오전 경기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화재 참사 현장 인근 모가실내체육관에 마련된 피해 가족 휴게실에서 유가족들이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br〉  연합뉴스

30일 오전 경기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화재 참사 현장 인근 모가실내체육관에 마련된 피해 가족 휴게실에서 유가족들이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br〉 연합뉴스

“일 끝나면 보러 오신댔는데…”

화재 현장에서 사망한 김모씨의 아들(23)은 사고 다음 날인 30일 오전 4시30분쯤 유족이 모여 있던 화재 현장 인근 모가실내체육관에 도착했다. 그는 오전 3시쯤 형(27)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대전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왔다고 한다. 아들 김씨는 날이 밝을 때까지 어머니를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어머니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아서다.

그는 “아버지가 이천에서 일 끝나면 대전에 와서 저녁을 사준다고 하셨다”며 “이천에서 대전까지 갈 만하다며 때때로 오셨는데, 이번에도 연휴라고 일 끝내고 오신다고 하셨다”고 말하다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1달여 전에도 이천에서 일을 끝내고 대전에 방문했었다고 한다. 아들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3일 전이다. 연락을 자주 못 드렸다”며 울먹였다.

30일 오전 2시 35분 B씨가 쓰러졌다는 119 신고를 받고 모가실내체육관에 출동한 앰뷸런스. 정진호 기자

30일 오전 2시 35분 B씨가 쓰러졌다는 119 신고를 받고 모가실내체육관에 출동한 앰뷸런스. 정진호 기자

“엄마 두고 어디 가느냐” 실신

20대 아들 임모씨를 잃은 어머니 B씨는 이날 오전 2시15분쯤 체육관에서 대기하다가 병원으로부터 사망자 신원이 확인됐다는 전화를 받고 울부짖다가 실신할 정도였다. 그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아들이 먼저 갈 수 있느냐” “엄마를 두고 어디 가느냐”고 며느리를 붙잡고 절규했다.

시청 관계자에 따르면 B씨가 며느리라 부른 여성은 지난달 임씨와 결혼식을 올리려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확산으로 결혼식 날짜를 미뤘다고 한다. 그 사이 참극이 벌어졌다. 가족들은 구급차를 부르고 B씨에게 병원에 가길 권유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꼭 봐야겠다”며 끝내 장례식장 영안실로 향했다.

영정 자리 빈 카자흐스탄 노동자

한편 30일까지 체육관이나 합동분양소의 유족 대기실에서 중국과 카자흐스탄 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세르게이는 분향소에 이름이 쓰인 위패만 놓였을 뿐 영정사진이 걸리지 못했다. 이천시 측에서 사진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천시와 경찰은 사망한 외국 근로자 유족을 위해 통역과 장례 절차를 지원할 계획이다.

30일 오후 3시 20분쯤 이천시 합동분향소에 카자흐스탄 출신 노동자 세르게이의 영정 사진이 들어가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이가람 기자

30일 오후 3시 20분쯤 이천시 합동분향소에 카자흐스탄 출신 노동자 세르게이의 영정 사진이 들어가야 할 자리가 비어있다. 이가람 기자

이천=정진호‧이가람‧박현주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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