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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기업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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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현대 경영이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본격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946년 '기업의 개념'을 펴낸 이후다. 제너럴 모터스(GM)의 후원을 받아 만들어진 이 책은 유명 대기업에 대한 최초의 분석 연구결과다.

그러나 막상 후원 기업인 GM은 이 책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하청업체에 선물용으로 구입하지 못하도록 압력까지 넣었다. 특히 당시 GM의 최고경영자 앨프리드 슬로언이 이 책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슬로언과 드러커의 견해 차이는 기업의 책임 범위에서 두드러졌다. 슬로언은 법을 지키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게 기업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러커는 경제적 성과 못지 않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기업은 외부 사회의 삶의 질까지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고, 이를 통해 존경받는 기업이 돼야만 장기 생존이 보장되는 데 GM은 이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피터 드러커', 존 플래허티 지음)

사회 마케팅 컨설턴트인 스티브 힐튼과 자일스 기번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기업의 사회적 리더십을 요구한다. 이들은 '멋진 비즈니스'에서 기업이 조직이나 브랜드를 이용해 세상을 바꾸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코카콜라가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방지 운동에 나선 것을 예로 든다. 또 기업이 공익사업에 돈을 기부하는 정도는 일차원적 사회 마케팅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얼마 전까지 SK는 국내에서 가장 이미지가 좋은 기업 중 하나로 꼽혔다. SK(옛 선경) 하면 떠오르는 게 1973년 시작된 장학퀴즈다. 당시 제품에 대한 홍보를 전혀 하지 않고 기업 이미지만 내세웠던 광고도 눈길을 끌었다. 고(故) 최종현 회장이 사재를 털어 74년 만든 한국고등교육재단도 SK의 이미지를 끌어올렸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고 노력한 기업이라 할 만하다.

이런 SK가 요즘 분식회계에 이어 비자금 및 정치자금 문제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일차적인 책임이야 기업 및 기업인에게 있지만, 많은 기업인이 남의 일로만 여기지는 않는 모습이다. 법을 지키며 사업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며 사업하는 게 교도소 담벼락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하소연도 들린다.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이세정 경제부 차장